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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58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6 신대륙, 각자의 꿈을 찾아 새로운 땅으로

영국의 청교도들은 가톨릭의 모든 색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어 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의 국교회에 속하지 않고 자가들만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어요.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그들을 분리파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자신들만의 신앙과 예배 방식을 고수했던 프로테스탄트들이 어떻게 북아메리카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분리파들을 차별한 제임스 제임스 국왕은 분리파들에게 불리한 법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분리파 신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내게 하기도 하고, 교회 건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죠. 그래서 그들은 헛간이나 마구간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죠. 사실 기회만 생긴다면 분리파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5 일본의 장군들

일본日本은 해가 떠오르는 땅이란 뜻이랍니다. 서구 세력들이 북서 항로를 찾아 나서던 그 무렵 일본 안에서는 내전이 빈번했어요. 일본에 황제는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다이묘'라 불리는 힘 있는 무사들이 일본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었죠. 다이묘들은 사무라이를 고용하여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게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황제도, 다이묘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떠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파는 장사치에 불과했죠. 돈도 없고, 가문도 없고 생김새 또한 내놓을만 하지는 않았죠. 그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장군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을 통일해 자신이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자였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강력한 사무라이를 그의 군대에 고용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충성을 다했고 전투에서..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4 북서 항로를 찾아서

한편, 북서 항로를 찾기 위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항로가 개척된다면 상인들은 곧장 중국과 인도 등의 나라들과 교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위를 물려 받던 그 해,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사무엘 드 샹플랭을 고용해 북서 항로를 찾는 일을 맡깁니다. 캐나다에 도착한 샹플랭 그는 대서양을 가로 질러 지금의 캐나다에 속하는 곳에 도착했어요. 그곳 사람들은 친절하게 그를 맞아 주었고 샹플랭 역시 그곳에 마음에 들었죠. 그곳은 프랑스 사람들의 새로운 정착지로도 손색없어 보였어요. 캐나다의 아름다운 절경에 푹 빠진 샹플랭은 프랑스로 돌아가 국왕에게 그곳의 아름다움을 설명했고, 그곳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자는데 동의했어요.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올..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3 제임스와 영국, 북아메리카

메리의 아들 제임스는 어려서부터 엄마와 떨어져 지내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라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신이 주신 신성한 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왕의 뜻은 곧 신의 뜻이라고 것이었죠. 그는 [자유 군주국의 진정한 법]이라는 책을 써서 왕의 신성한 권리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 책에는 "국왕은 모든 영토를 지배하는 대군주이며, 그 영토 안에 사는 사람들의 주인으로 그들의 생과 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쓰여있어요. 두 왕국의 왕이 된 제임스 제임스는 20년간 스코틀랜드를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가장 가까운 친척인 제임스는 영국의 국왕이 되면서 두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어요.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 영국..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2 프로테스탄트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에게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물려주었을 때, 네덜란드에는 침묵자 빌렘이라는 귀족이 있었답니다. 그는 '오렌지 공'이라고도 불리는 그가 프랑스의 오랑주(영어로 오렌지)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죠. 빌렘은 펠리페보다 6년 늦게 태어났어요. 펠리페가 궁정에서 살았던 것과는 달리 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습니다. 빌렘이 10대 때에 프랑스 남부 지방과 네덜란드의 어느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두 곳 모두 카를의 제국 안에 속해 있었죠. 카를과 빌렘 카를은 빌렘이 장차 강력한 귀족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를 궁정으로 데려와 교육시켰습니다. 카를은 그가 부모와 같이 프로테스탄트로 자라나 가톨릭에 적대적이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빌렘은 자라 갈수..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1 카를 5세, 펠리페 2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1세 세계의 많은 곳을 통치했습니다. 근대로 접어든 세계에는 펠리페 2세의 십자가 깃발괴 페르디난트의 쌍독수리 깃발로 뒤덮여 있었어요. 카를 5세 1500년대 네덜란드 국왕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의 할아버지는 독일의 작은 나라들을 다스리는 통치자였고, 또 다른 할아버지는 스페인 국왕이었습니다. 그 집안에는 왕이 셋이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카를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는 어린 나이에 네덜란드의 통치가가 될 수밖에 없었죠. 열여섯 살에는 스페인 통치자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번엔 스페인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열아홉 살에는 독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독일 국왕의 자리도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카를은 세 나라의 국왕이 된 것에 만족하지 ..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역사란 인류가 살아온 지난날들의 대한 기록이에요. 이렇게 기록이 문자로 남아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럼 문자가 남아 있지 않은 그 이전에 과거는 어떨까요? 그때에도 남아 있는 문자 기록은 없지만 사람들은 많은 흔적을 남기고 살아왔지요. 그렇게 문자의 기록은 없지만 남아 있는 흔적을 유물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말해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통틀어 우리는 “역사”라고 부릅니다. 한마디로 인류가 살아온 흔적들 혹은 인류의 이야기들 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역사가, 고고학자들은 무슨 일을 할까? 하지만 과거의 일들이 현대에까지 잘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역사가들은 여러가지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일들을 한답니다. 유품, 책..

세계사 2022.03.02

[세계역사 이야기] 중세3 비잔틴 제국

광활한 로마제국을 한 명의 왕이 다스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둘로 나눠졌어요. 수도인 로마가 포함된 곳을 서로마, 나머지는 동로마라고 불렀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유명한 도시랍니다. 야만인들이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도 많은 영토를 빼앗겼어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일부 땅들만 지킬 수 있었죠. 옛 로마의 명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동로마 제국을 우리는 비잔틴 제국이라고 합니다. 비잔틴 제국은 많은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작은 나라가 되었죠. 하지만 강력한 로마제국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땅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답니다. 과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게 된것입니다...

[세계역사 이야기] 중세2 - 브리튼 섬의 기독교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시대를 중세라고 합니다. 로마제국은 사라졌지만 중세에도 여전히 기독교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황을 따랐으며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전 세계의 기독교도들을 돌보는 책임을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교황은 시장에서 노예가 거래되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노예로 거래되는 사내아이들은 아직 어린 소년들이었습니다. 교황은 그중에서 금발 머리를 한 천사 같은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검은 머리만 보아왔던 교황의 눈에는 정말 천사처럼 보였어요. 교황은 그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앵글 족이라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교황은 그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가지 않도록 돈을 지불하고 그들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돌보며 교육도 시키고 기독교를 가르쳤어요. 캔터..

[세계역사 이야기] 중세1- 브리튼의 켈트 족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 로마제국에 속해있던 많은 영토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브리튼도 그랬죠. 브리튼의 군사들은 온몸에 푸른 칠을 한 거친 전사였습니다. 그 전사들이 바로 켈트 족입니다. 서로마가 멸망하자 켈트 족 사람들은 로마 병사들을 모두 몰아냈어요. 다시 브리튼 섬을 차지하게 된 것이죠. 켈트 족의 전투 능력은 그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했습니다. 브리튼 섬에 들어온 야만인 하지만 브리튼에 살았던 켈트 족 사람들은 한 나라의 백성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각의 왕들을 섬기고 있었어요. 전해져 내려져 오는 이야기 의하면, 보티건이라는 왕이 있었어요. 그는 브리튼 섬의 요지를 점하고 있었던 강력한 부족의 왕이었죠. 하지만 보티건은 마음 편할 날이 없었어요. 북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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