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세계사] 근대편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5 일본의 장군들

뽀선생Kimppo 2022. 3. 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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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은 해가 떠오르는 땅이란 뜻이랍니다. 서구 세력들이 북서 항로를 찾아 나서던 그 무렵 일본 안에서는 내전이 빈번했어요. 일본에 황제는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다이묘'라 불리는 힘 있는 무사들이 일본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었죠. 다이묘들은 사무라이를 고용하여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게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황제도, 다이묘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떠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파는 장사치에 불과했죠. 돈도 없고, 가문도 없고 생김새 또한 내놓을만 하지는 않았죠. 그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장군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을 통일해 자신이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자였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강력한 사무라이를 그의 군대에 고용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충성을 다했고 전투에서 공로를 쌓아갔고 장군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한 걸음씩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제일 아끼는 장수가 되기까지 이릅니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노부나가가 살해당하고 말았어요. 그의 계승자는 젖먹이 아기였고 4명의 사무라이는 그 아기를 지키겠다고 나섰죠. 하지만 그것은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속셈이었어요. 히데요시는 당시 멀리서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히데요시는 4명의 사무라이를 모두 격파하고 노부나가의 장례를 치렀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보다 더욱 강력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적을 사정없이 죽였다면 히데요시는 그에게 충성을 받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반항할 여지가 있는 자들의 무기를 모두 빼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일본을 손에 넣은 히데요시는 일본을 세계 제일의 제국으로 만들고 싶었죠. 그는 거대한 땅 중국을 손에 넣고자 했습니다. 

 

중국을 탐내는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중국을 치러 가는데 한국을 통해서 가길 원했어요.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들을 척도 하지 않았죠. 그러자 히데요시는 중국 전에 한국을 제압해야 겠다 결심했죠. 한국의 남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국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으며 북쪽으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중국이 한국을 도우러 왔고, 히데요시의 군대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한국 해군이 일본 해군보다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데요시의 보급선은 한국 해군의 거북선에 의해 박살 났습니다. 거북이 같이 생겼다 해서 거북선이라 불린 그 배는 철갑을 두른 모습을 하고 대포를 쏘아댔지요. 일본 배들은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게된 히데요시는 중국 공주를 일본 황제와 결혼시키면 조용히 물러나겠다고 제의했어요. 나중에 중국 공주가 아들을 낳으면 중국의 황제 자리를 주장해 보려는 속셈이었죠. 하지만 콧대 높은 중국은 그 속셈을 알아차리고도 남았으니 그 제의를 받아 드릴 수가 없었죠. 히데요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국을 쳐들어 갔지만, 전쟁이 막 시작할 무렵 병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일본을 지배하는 것에는 성공을 했지만, 중국을 정복하는 것은 꿈으로만 남게 되었던 것이죠.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역시 노부나가의 장수였죠. 노부나가가 죽고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받치겠다 맹세했습니다. 그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키는 보호자들 중 하나로 그를 임명합니다. 이에야스는 충성된 모습으로 히데요시의 신임을 쌓아갔고 갈수록 늘어나는 재산으로 자신만의 군대를 키워나갔습니다. 히데요시가 죽자 드디어 이에야스는 자신의 때가 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히데요시가 죽고 어린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보호하던 5명이 모두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싸웠습니다. 다이묘는 다섯 살짜리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서군과, 이에야스를 따르는 동군으로 나눠져 싸웠습니다. 이에야스는 서군의 다이묘들에게 전투가 벌어졌을 때 동군을 위해서 싸운다면 그에 합당한 당과 돈을 주겠다고 설득했고, 그 제안은 그들의 마음에 들었지. 히데요시가 죽은 지 2년 후에 동군과 서군의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 이 전투의 이름이 '세키가하라 전투'랍니다. 결과는 당연히 이에야스에게 매수된 다이묘들이 싸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동군의 승리로 끝났어요. 

 

세키가하라 전투

 

이에야스는 '쇼군(장군)'이란 칭호를 얻어 일본 군사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때가 올 때까지 오랜 기다림의 결과였습니다. 이야에스는 수도를 에도시로 옮겼어요. 에도는 지금의 도쿄랍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자기 자손들에게 대대로 쇼군이란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죠. 자신처럼 싸우지 않고도 편안하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다이묘들의 권력을 약하게 만들기로 합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성 외에는 다른 성을 갖지 못하게했고,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게 했지요. 다이묘들은 반드시 집안 식구들을 에도에 보내 살게 해야 했는데 반란을 꿈꾸다가도 쇼군의 도시에 가족을 떠올리고 단념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사무라이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다이묘들 아래서 싸웠던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 가문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죠. 그래서 이에야스는 그들에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무술 뿐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도 가르치고 또 씨름도 하게 했어요. 그래서 일본 사무라이들 중 시와 음악으로 유명해진 사람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스모'라는 씨름 대회를 하는데 이에야스 때에 사무라이에게 권장했던 그 씨름이 바로 '스모'였습니다. 

 

히데요리

 

마지막으로 히데요시의 자손인 히데요리가 살아있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었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4년이 지난해에, 이에야스는 군대를 오사카로 보내 히데요리가 살고 있는 성을 포위했어요. 성이 포위된 지 1년이 지나자 히데요리는 패배를 받아들여 자결했습니다. 일본의 무사들은 적의 포로가 된다는 것을 최고의 수치라 여겼기에 자결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예요. 이렇게 이에야스에 의해 시작된 도쿠가와 막부가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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