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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역사 이슈들 38

세파르디 유대인과 아슈케나지 유대인

경제는 유대인들의 이주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큰 흐름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16세기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가 가졌던 통상의 흐름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독일과 동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들을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불러들이는 효과를 냈습니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란? 독일 라인 강 유역이나 프랑스 지역에 살던 유대인으로 십자군 전쟁 때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피신한 유대인을 말한다. 아슈케나지란 히브리어로 ‘독일’이란 뜻에서 유래 되었는데 이는 노아의 셋째 아들 ‘야뱃의 자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중세에 라인 강은 상업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어요. 당시 라인 강 주변 지역에는 박해와 전쟁을 피해 온 유대인 공동체가 많았고, 15세기 말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최초의 주식회사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네덜란드는 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1602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다국적 기업이면서 처음으로 주식을 발행한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합니다. 주식회사는 주식을 발행하여 여러 사람들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고, 자본과 경영이 분리되는 형태의 회사입니다. 16세기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유럽을 가톨릭으로 재통합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들끓었습니다. 그는 계속 전쟁을 일으켰고 채무에 시달렸던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던 네덜란드에 상거래에 대한 10%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에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은 무려 80년간 지속되었어요. 이렇게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전쟁 중이던 16세기 말 동양의 항로를 독점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스페인 편에 서면서 네덜란드..

청어절임으로 건설된 도시, 암스테르담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황 중심의 기독교 세계를 무터트렸습니다. 루터는 사제들만 읽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를 통해 근데 독일어의 근간이 정리되었어요. 이러한 성경은 발전된 인쇄과 만나 각지로 퍼져나갔고 보통 사람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단시간에 독일 전체로 퍼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 16세기 앤트워프는 스페인의 공격을 받았고 이에 반격하기 위해 용병을 끌어들이면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약탈을 일삼았는데요, 그것은 이들이 급료를 제 때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은 쇠락하는 앤트워프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갑니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텔의 강둑'이라는 뜻으로 13세기 어민들이 암스텔 강에 둑을 설치하고 살았기 때문에 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회주의 인물, 용어 정리

공산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스탈린주의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행됭어야 하는 용어를 정리해 보려합니다. 아래 내용은 사전의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옳고 그름에 판단없이 사전적 용어 정리입니다. 공산주의 : 사유 재산의 철패, 생산 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 사회, 정치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 사회주의 :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 경제와 모든 사람이 노동의 대가로 평등하게 분배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사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유물사관 :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역사관, 사회계급과 경제적 제약이 역사적 결과를 도출하는 중심이라 주장, 노동계급과 피억압민족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주요한 기여를 했다. 유물론 : 물질을 1차적,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 파..

브뤼헤 항구의 번성 (feat. 중계무역)

중상주의란 상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책입니다. 이렇게 상업을 중시했던 시대는 16세기부터 약 3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때 자본주의의 밑바탕이 마련되었습니다. 유럽은 상업을 이처럼 중시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화폐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했습니다. 값싼 원료를 확보하고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식민지를 개척해 나갔던 것도 바로 이 때입니다. 브뤼헤 항구, 모직물 산업 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반유대 정서가 고조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플랑드르로 탈주했어요. 3차 십자군 전쟁 때, 영국의 유대인들은 일시에 추방 당했습니다. 반유대 정서를 명분삼아 자신들의 빚을 무효화 하고자 유대인들을 한꺼번에 내쫓은것은 영국의 왕과 귀족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재산도 몰수했어요. ..

바이외 태피스트리 헤이스팅 전투

길이만 70미터에 육박하는 자수 작품을 아시나요? 이 작품은 노르망디 윌리엄 공작과 웨섹스의 해럴드 백작의 왕위 쟁탈 전쟁인 헤이스팅 전투의 이야기를 수로 놓은 작품입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라고 불리죠.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윌리엄의 이복동생인 오도 주교가 작품을 의뢰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작품 안에 오도 주교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등장하고, 오도 주교가 지은 바이외 성당에서 태피스트리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힘을 얻습니다. 태피스트리는 직물 공예로 색실을 짜넣어 그림을 표현하는 방식인데, 이 작품은 엄밀이 말하면 태피스트리라기 보다는 자수 작품으로 볼 수 있어 그 이름을 '켄터베리 자수'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헤이스팅 전투 1066년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가 ..

해가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할 수 있게 지원한 스페인의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의 자녀들을 유럽 여러 왕가에 결혼시켜 유럽 왕실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게됩니다. 이렇게 결혼 관계로 협정을 맺어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죽자 손자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탄생해요. (1516) 카를로스 1세 외할아버지에겐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을 외할머니에겐 카스타야 왕국과 신대륙을, 친할아버지에게서는 오스트리아를, 친할머니에겐 네덜란드의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팽창정책을 선택했어요.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가 죽은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에 앉았고 신성로마제국에서..

흑사병과 유대인

14세기 유럽은 백년전쟁과 흑사병으로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흑사병은 크림 반도 남부에서 발원했어요. 그리고는 이탈리아 상선대에 의해 무역로를 따라 이탈리아에 창궐했습니다. 그리고 1347년에는 프랑스 전역으로 그 다음해는 영국과 북유럽, 러시아까지 흑사병의 맹공격은 이어졌습니다. 전염병은 유럽전역에 타격을 가했고 4년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습니다. 특히 도시에 경우에는 그 피해가 상다했어요. 인구의 반을 잃기도 했으니까요. 그 이후에도 8년에 한번 꼴로 반복적으로 발생했고 유럽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갔어요. 당시로서는 병을 치료할 수단을 찾지 못했습니다. 유럽에서 인구가 급증하면서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졌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당연히 영양 상태가 좋지 안하았습니다. 그러니 병에 대..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과 콜럼버스의 항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력이 약해진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 전쟁은 어떻게 버텨보았지만 1492년 그라나다에서 항복하므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퇴각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가톨릭 수호라는 명목으로 이슬람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뤄냈죠. 이것을 레콘키스타이라 부르고 '재정복'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벨 여왕은 평화로운 레콘키스타를 이뤄냈는데요, 이슬람교도의 종교와 재산권, 상권을 유지해 주겠다는 이사벨의 조건을 받아들인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 12세가 저항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사벨 여왕은 궁전과 거대한 도서관을 그대로 사용했는데요, 이때부터 이슬람에 비해 과학이나 학문에서 뒤처져 있던 유럽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카노사의 굴욕

11세기 들어 교황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고 정치적 권력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당시 대단했던 교황의 권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재임하자마자 교회 개혁과 쇄신 운동을 펼쳤어요. 그레고리 7세는 당시 왕이 가지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을 교회로 가져오려 하였습니다. 이때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반발했고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와주는 귀족, 사제도 모두 파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어요. 하인리히 4세는 계속 맞서 싸우고 싶었지만 많은 귀족들이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습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이 연출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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