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역사 이슈들

카노사의 굴욕

뽀선생Kimppo 2021. 9.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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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들어 교황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고 정치적 권력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당시 대단했던 교황의 권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재임하자마자 교회 개혁과 쇄신 운동을 펼쳤어요. 그레고리 7세는 당시 왕이 가지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을 교회로 가져오려 하였습니다. 이때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반발했고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와주는 귀족, 사제도 모두 파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어요. 하인리히 4세는 계속 맞서 싸우고 싶었지만 많은 귀족들이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습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이 연출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카노사의 굴욕

1076년 겨울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하인리히가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오고 있다고 생각해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하는 교황을 위해 카노사 성의 백작부인이었던 마틸다는 카노사 성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교황을 공격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죠. 그는 교황의 거처 근처에서는 왕의 모습이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 카노사를 향해갔습니다. 거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하인리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문 앞에 서 있었고 결국 3일만에 카노사 성문이 열렸습니다. 파문은 취소하였고, 하인리히 4세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카노사의 굴욕 사건으로 하인리히는 교황의 용서를 받았지만 독일의 귀족들은 루돌프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고, 루돌프를 상대로 내전이 일어납니다. 교황은 중재자의 역할을 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어요. 1080년 그레고리 7세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내전에서 하인리히가 승리했고 귀족들은 그에게 굴복하여 교황의 파문은 효력이 없어졌습니다. 독일 안에 세력을 회복한 하인리히는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공격하고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1084년에는 로마를 탈환하였고 그레고리 7세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도피했습니다. 하인리히는 교황을 퇴위시키고 라벤나의 주교인 귀베르트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하여 새로운 교황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 7세도 여기서 복수를 꿈꾸며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인 로베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인리히가 로마를 탈환하지 단 2개월 만에 다시 로베르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로 진격해왔고 하인리히 4세는 신속히 퇴각해 신성로마제국(독일)으로 돌아갔습니다.

로베르의 군대는 로마로 진격하여 교황을 구출해 내지만, 그 과정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고 로마의 피해는 극심했습니다. 교황의 요청으로 들어온 로베르 군데의 만행에 불만을 품은 로마 시민들은 교황에 대해 쌓여있던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결국 로베르 군대와 망명길을 떠났습니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던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로마 시민들에게 버림받은 것이죠.


이 사건은 교황의 권력이 세상의 권력에 승리를 거둔 거둔 사건으로서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항해 문화투쟁을 버릴 때

우리는 카사노로 가지 않는다


라고 연설했어요. 이 말은 카사노의 굴욕을 의미한 것으로 가톨릭에 굴복하지 않고, 문화적, 종교적으로 자신만의 길을 갈 것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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