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역사 이슈들

청어절임으로 건설된 도시, 암스테르담

뽀선생Kimppo 2021. 10. 1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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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은 교황 중심의 기독교 세계를 무터트렸습니다. 루터는 사제들만 읽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를 통해 근데 독일어의 근간이 정리되었어요. 이러한 성경은 발전된 인쇄과 만나 각지로 퍼져나갔고 보통 사람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단시간에 독일 전체로 퍼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

16세기 앤트워프는 스페인의 공격을 받았고 이에 반격하기 위해 용병을 끌어들이면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약탈을 일삼았는데요, 그것은 이들이 급료를 제 때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은 쇠락하는 앤트워프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갑니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텔의 강둑'이라는 뜻으로 13세기 어민들이 암스텔 강에 둑을 설치하고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 16세기 암스테르담에 유대인이 이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 정책 때문이었죠. 

 

암스테르담은 종교적 자유를 선언하면서 유대인뿐 아니라 전 유럽의 종교 난민을 수용할 수있어요. 암스테르담의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을 이루었고, 암스테르담이 발전하자 유럽의 상인과 예술가들도 유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암스테르담은 유럽 최대의 항구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상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동인도 항로가 추가되면서 아시아 무역에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의 시대를 활짝 열었는데 1590-1609년 사이를 '유대 대상인의 1차 중흥기'라고 부릅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지원해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맞게 됩니다. 

 

 

청어 열풍

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네덜란드는 사실 척박한 환경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유대인들은 중계무역에 주목했는데요,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연안에 청어잡이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14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한 어부는 청어의 내장을 빼고 소금에 절여 보관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바다에서 잡은 청어는 바로 염장법으로 저장하여 장시간 보관할 수 있게 됩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절인 청어는 히트를 쳤습니다. 이또 유대인들은 청어뿐만 아니라 청어를 절이는 소금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당시 소금은 육로를 통해 수입되는 비싼 값의 암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해 가격도 낮추고, 질도 높이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죠. 유대인들은 청어절임 만드는 과정을 분업화해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고, 위원회를 설립해 청어절임의 품질도 엄격하게 지켜 나갔습니다. 

 

이렇게 청어잡이가 호황을 누리자 네덜란드는 그와 연결된 산업들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는 조선업이 발달했고 그다음으로는 목재업이 호황을 누렸어요. 그 외에 산업도 발전함에 따라 네덜란드의 경제는 날로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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