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역사 이슈들

세파르디 유대인과 아슈케나지 유대인

뽀선생Kimppo 2021. 10. 1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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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유대인들의 이주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큰 흐름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16세기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가 가졌던 통상의 흐름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독일과 동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들을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불러들이는 효과를 냈습니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란? 독일 라인 강 유역이나 프랑스 지역에 살던 유대인으로 십자군 전쟁 때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피신한 유대인을 말한다. 아슈케나지란 히브리어로 ‘독일’이란 뜻에서 유래 되었는데 이는 노아의 셋째 아들 ‘야뱃의 자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중세에 라인 강은 상업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어요. 당시 라인 강 주변 지역에는 박해와 전쟁을 피해 온 유대인 공동체가 많았고, 15세기 말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17세기 30년 전쟁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동유럽으로 갔고, 폴란드 등의 지역은 경제 발전을 위해 유대인들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계 세파르디 유대인과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사실 매우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 둘은 통합이 잘 안되었고, 예배당도 따로 지어 살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세파르디는 재력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상류층을 이루었고, 아슈케나지는 하류 다수층을 이루었어요.

이베리아 반도에 살았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이슬람의 지배 아래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고 고전 과학과 철학의 전달자 노릇도 했습니다. 고대와 중세를 연결시키는 연결고리로써 세파르디 유대인은 역할을 했으며 고전의 세계를 부활시켰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항해는 그들의 도움이 컸는데요, 항해사와 지도 제작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들은 투르크제국, 브라질 등지에서 설탕, 목재, 담배, 다이아몬드 등을 교역하는 상인들과 연결된 은행가들이었습니다.

반면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영세 수공업이나 거리의 행상들로 17세기가 되서야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고립된 삶을 스스로 선택했어요.

이 포스팅은 홍익희 선생님의 [유대인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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