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역사 이슈들

청교도 혁명과 브레다 조약

뽀선생Kimppo 2021. 10. 31.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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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 시대에는 영국에서 실용주의가 대두되었고 이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습니다. 1290년 애드워드 1세에 의해 영국에서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은 간헐적으로 영국에 들어오다가 1500년경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시선이 한층 더 부드러워지면서 런던, 브리스톨 등지에 유대인 거주지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청교도혁명

청교도 혁명과 유대인

1559년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을 따르지 않았던 청교도들은 칼뱅주의에 의한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엄격한 도덕룰, 신성한 주일 엄수, 향락에 제한을 주장했죠. 이러한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때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로 피신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신대륙으로 떠나기도 했고요. 그 후 청교도는 영국 내에서 세력을 키워 정치적 영향력을 형성했습니다. 시민의식이 발달하고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도 함께 고조되어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시민혁명으로 의회파 크롬웰에 의해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설립되어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의 교리는 구약성경을 중요시하고 가톨릭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유대교와 비슷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심한 박해를 받아왔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도 있었죠. 이런 분위기에서 유대인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크롬웰은 1656년 마침내 유대인 이주를 허용했고 유대인들은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청교도 혁명 당시 많은 상인들과 특별히 유대 금융인들은 크롬웰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크롬웰에게 큰 전쟁 비용을 부담해 주기도 했죠. 이를 잊지 않은 크롬웰은 자신을 도운 상인들을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귀족과 교회에게 반납받은 토지를 재분배하면서 유대 상인들도 특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구도심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해 경제자유구역으로 만들어 준 것이죠. 유대인 금융업이 세력에 의해 침해받지 않도록 보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런던 경제의 중심지가 되어 유대인이 몰려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해 오늘날의 런던시티가 되었습니다. 

크롬웰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브레다 조약

1660년 영국이 선포한 2차 항해조례는 중요한 상품을 영국 식민지에서 영국과 영국령으로만 수출할 수 있게 제한한 것이었습니다. 또, 1663년 3차 항해조례에서는 유럽 대륙에서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로 가는 모든 화물은 영국에 먼저 내린 후 다시 적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화물에 영국의 관세를 부과해 직접 무역을 제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1665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다시 전쟁을 시작했고 수차레 전투 끝에 네덜란드가 승리했습니다. 그해 7월 브레다 조약을 맺게 되는데 영국은 뉴욕을 얻게 되었고 네덜란드는 사탕수수 산지인 수리남을 받고, 분쟁 중이었던 육두구 산지인 반다 제도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습니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영국은 왕정이 복고되었습니다. 영국의 왕좌에 찰스 2세가 복귀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제임스 2세가 전제정치를 펼치며 가톨릭을 강요했고 이에 반대해 명예혁명이 일어납니다. 귀족들은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을 영국 왕으로 추대했고 의회에서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에게 군대를 이끌고 귀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해 윌리엄, 메리 부처는 군대를 이끌고 영국 남서부에 착륙해 런던으로 진격했고 윌림엄의 장인이었던 제임스 2세는 불리해지자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이것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다고 해서 무혈혁명 즉 명예혁명이라 합니다. 

 

1689년 의회는 윌리엄, 메리부처에게 권리선언을 제출해 승인을 받았고 공동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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