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역사 이슈들

영국의 해적질과 스페인 무력함대 격파

뽀선생Kimppo 2021. 10. 3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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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원래 상업을 천시하고 적을 공격해 당당하게 정복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겼어요. 상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상인은 도둑질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17세기까지 영국의 상선은 해적과 별로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요한 주산물의 무역조차 외국인들이 장악했는데, 이는 영국의 낙후된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국가 차원에서 해적질을 일삼기도 했어요.



유대 상인과 영국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변방국에 불과했던 영국은 2백년 후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계적인 통치자가 됩니다. 사실 영국은 양모와 모직물 말고는 특별한 산업이 없었어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온 유대인 상인들이 영국의 양모 수출을 주도했는데, 당시 유대인은 상인과 동의어로 생각될 정도 였습니다. 17세기 초 단일 상품을 수출하는 것과 앤트워프라는 단일 시장은 영국경제에 취약점이었습니다. 만약 이것들 중 하나라도 흔들린다면 영국은 불황에 빠질 위험이 있었어요. 1617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인해 앤트워프 시장이 몰락하면서 영국에는 큰 불황이 닥쳐 왔습니다.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고 더 큰 이유을 찾아 교역했고, 영국은 왕실에서 알면서도 묵인하는 해적질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영국의 해적질


당시 영국의 해외진출은 정부가 아닌 해적이 주도했는데,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분배제도와 보험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역선을 공격해 거래상품들을 약탈했는데, 영국의 해적질은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영국 왕실은 해적들에게 포를 적재한 무력선에 대한 허가를 내주었는데, 영국 입장에서 해적질은 스페인을 상대로 한 게릴라전가 비슷했습니다. 스페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죠. 영국 해적들은 스페인 배를 공략해 많은 자산을 빼앗았습니다. 엘리자비스 여왕의 방조 아래 해군을 대신한 영국 해적들은 스페인 함대들과 해상교전을 자주 벌였어요.

 


스페인의 무력함대 격파


이렇게 해적을 이용해서 스페인을 견제했던 엘리자비스 1세 여왕은 즉위하자 바로 통일령을 발표, 영국교회인 성공회를 확립했고 국왕을 종교적으로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게 했습니다. 여왕은 영국 해적들이 주로 스페인 상선들을 공격하도록 조장했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상선과 함대를 계속해서 공격하는 영국 해적들을 처형하라고 여왕에게 요구했지만 여왕은 오히려 그들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했습니다. 이 일은 펠리페 2세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구혼실패와 함께 엄청난 모욕이었습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펠리페 2세는 1588년 무적함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출격합니다. 그러나 스페인 함대는 태풍을 만나 시간을 끌게되었고 출발한지 두달이 지나서야 영국해협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두 달동안 영국 여왕은 미리 대기하고 있다고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은 스페인 함대를 기습공격했습니다. 영국의 배는 기동성이 좋았는데 이러한 작은 배들로 장거리포를 쏘고 치고 빠지는 작전이었죠.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는 지쳤고 칼라이스에 닻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은 작은 배에 장작과 역청, 화약 등을 폭발 물질들을 가득 싣고 기습공격을 단행했습니다. 스페인 전함들은 무참히 침몰했고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것이죠.


크롬웰의 항해조례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와 그 뒤를 이은 찰스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와 대립했습니다. 이것은 내란으로 이어졌고 1645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이 승리했어요. 17세기 중엽 무역에서 독주하던 네덜란드는 크롬웰의 항해조례를 통해 제동이 걸렸습니다. 이 조례는 다른 나라들이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와 무역을 하려면 반드시 영국 배이거나 영국 식민지의 배만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이것은 해운과 무역에서 네덜란드를 배제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장과 승무원도 반 이상이 영국인이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어요.


영국- 네덜란드 전쟁 - 설탕


당시 유럽은 신대륙 서인도제도의 설탕 무역으로 부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탕수수 농장이 있는 서인도제의 섬은 의회가 아닌 영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이후 내전에서 영국의 의회가 승리하자 그 지역의 무역을 주도하던 네덜란드의 설탕 무역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죠. 1655년부터 서인도제도산 설탕 무역의 종주권은 영국이 빼앗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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