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외무역 팽창으로 자금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금융기관에 대한 요구가 커져갔습니다. 이렇게 영란은행이 탄생하게 되는데요, 이것 외에도 영란은행이 탄생한 배경이 더 있습니다. 1689년 영국 왕위를 계승받은 윌리엄은 재정적자 문제가 컸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난 것입니다. 영국은 세금을 올려서 그것을 충당해보려 했지만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692년 국채 발행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재정혁명입니다. 국채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의회에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의회가 재정 운용권을 가지게 되자 국가채무에 대해 지급을 보장해 주기도 했습니다. 국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것이죠. 그러나 국채를 발행해도 재정적자를 메꿀 수가 없자 윌리엄은 유대인 금융가들에게 협조를 요청합니다. 국가 부도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죠.
민간 소유 중앙은행 탄생
유대인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주축이 된 이 금융가들은 왕에게 돈을 모아서 빌려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 설립을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전쟁비용이 필요한 윌리엄이 요청한 돈 120만 파운드를 주식회사 은행을 세우고 모아지는 자본금을 모두 국왕에게 대부하겠다고 했죠. 윌리엄 3세는 전임 제임스 2세의 왕위 탈환 움직임이 보이고 이를 지원하는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했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인들의 제안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채무는 이자만 지급하면 원금은 영구히 갚지 않아도 되는 영구 채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은 최초로 은행권을 찍어 낼 수 있는 발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3세는 영란은행에 은행권 발행 독점권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전쟁 자금을 빌리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화폐 주조권을 넘긴 것이죠. 이렇게 영국의 중앙은행이 탄생했습니다. 화폐 주조권을 손에 넣은 유대인들은 은행을 세웠고 이것이 영란은행입니다.
영란은행은 여느 개인기업처럼 주식공모를 통해서 설립자금을 모집했습니다. 하지만 투자받은 금액은 80만 파운드에 그쳤어요. 그럼에도 돈이 급했던 영국 정부는 영란은행의 창립을 허가했습니다. 영란은행은 첫 대출로 정부에 80만 파운들을 빌려주었고 정부는 이 은행권을 이용해서 프랑스와 싸우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은행권이 유통되었습니다. 영란은행은 이렇게 대출을 통해서 이자도 톡톡히 챙겼습니다. 이 제도는 화폐의 발행과 국채를 묶어 놓는 구조라 화폐를 발행할 때마다 국채가 늘어나는 구조였습니다. 그렇다고 국채를 상환하면 화폐를 폐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채무를 상활 수도 없었어요.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고 이자도 갚아야 하기 때문에 화폐 수요는 계속해서 늘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 돈을 다시 은행에서 빌려 와야 했기 때문에 국채는 계속 불어났습니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는 고스란히 영란은행의 이윤이었고 영국은 이를 국민 세금으로 부담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정부가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하니 영국의 금융업는 크게 발달했어요. 런던의 유통 자본이 늘어났고 국채의 신뢰도가 높아지니 이자는 하락했습니다. 이후에도 국채는 계속 발행되어 2012년 초 영국 정부의 채무는 1조 파운드로 늘어나 영국 GDP의 6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미국이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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