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십자군 전쟁(4) 십자군의 쇠퇴

뽀선생Kimppo 2021. 10. 22.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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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4년, 화레즘 용병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화레즘 용병들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기독교도들과 시리아 무슬림의 연합군을 격파했어요. 화레즘 제국은 지금의 히바에 있었던 투르크계 국가였습니다. 이 일로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십자군을 소집했는데 이것이 제7차 십자군이었습니다. 

 

 

알카밀(우측)을 만나는 프리드리히 2세(좌측).  조반니 빌라니 의 《 신연대기 》 삽화

 

제7차 십자군 전쟁

십자군은 1249년 이집트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돈 도중 포로로 붙잡히고 맙니다. 휴전 조약을 체결하고 몸 값을 지불 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죠. 

 

제8차 십자군 전쟁

13세기 말 지중해 동쪽은 이해관계로 얽힌 세력들 때문에 복잡했습니다. 이 때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되었고 여러 세력들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잉 시칠리아와 비잔티움 영토를 탈취했고, 딸들을 비잔티움 제국의 유력한 세력과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1207년 샤를의 형인 루이 9세는 제 8차 십자군을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의 왕 자리를 노렸던 샤를은 형을 설득해 튀니스의 아랍 반군 세력을 공격하게 했지만, 루이의 십자군은 풍토병으로 힘을 잃었고 루이도 그 곳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잉글랜드의 왕자 에드워드를 비롯한 소규모 군단만 남아서 싸웠는데 이것을 제9차 십자군 전쟁이라 합니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 되었고, 아크레의 기독교도 시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제9차 십자군 전쟁

에드워드 왕자는 암살의 위협을 겪은 뒤 10년 휴전이라는 조약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습니다. 1281년 프랑스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프랑스의 샤를은 교황청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엇죠. 샤를은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십자군을 일이키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황제인 미하일 8세의 배후 조종으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일어납니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 : 1282년 부활절에 시칠리아 왕국에서 앙주 카페가의 시조 카를루 1세에게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으로 3천여명의 프랑스 인들이 살해당했고, 카를루 1세는 왕국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반란은 6주에 걸쳐 일어났어요.

이 반란으로 샤를 당주는 시칠리아에 지배력을 잃었고, 아라곤왕 페로 3세가 시칠리아 왕이 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쇠퇴와 십자군 국가들의 분열 원인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군 전쟁을 보는 시각도 다양한데요,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순례 여행이었고, 대부분의 십자군은 성지만 찍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십자군이 제각기 각자의 이해를 가지고 움직였고, 일회적인 군대들의 집합이었습니다. 십자군 국가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상비군이 필요했습니다. 종교적 열정으로 모험을 떠난 십자군은 허약한 지휘통제 아래서 점차 소멸되어졌습니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다양한 리더를 배출하며 승리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1289년 트리포리가 함락되고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십자군 국가라는 명목은 완전히 사라지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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