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십자군 전쟁(3)- 제3차 십자군, 제4차 십자군

뽀선생Kimppo 2021. 10. 14.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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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실권을 잡은 살라흐 앗 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온 일생을 다 받쳤습니다. 십자군 국가들을 포위한 그는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이 항복하면서 예루살렘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십자군 대조적으로 기독교인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에 충격을 받은 유럽은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목표로 다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합니다. 

 

3차 십자군

교황 그레고리오 8세의 호소에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십자군의 선봉으로 1189년 출발했습니다. 룸 셀주크 제국의 수도 이코니움을 점령했지만 다음 해 프리드리히가 익사하자 군은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전진했으나 시리아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병사와 프랑스에서 동원된 병사들은 아크레를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곧 영국의 리처드의 군도 합세하였습니다. 마침내 아크레는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의 3 사령관의 주도권을 싸고 분열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리처드만 남겨둔 채 귀국했습니다. 

 

리처드는 아크레를 항복하고 맺은 협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억류했더 무슬림을 모두 처형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서 항구 야파를 탈취하려고 했습니다. 아르수프를 행군한던 십자군은 살라흐 앗딘에 공격받았지만 리처드의 활약으로 승리합니다. 이 전투가 아르수프 전투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 까지 성공했습니다. 리처드는 살라흐 앗딘과 휴전협정을 맺습니다. 아크레를 포함 티레부터 야파에 이르는 해안부의 모든 항구는 예루살렘 왕국의 관리로 두고,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통치하에 둔다는 내용이었죠. 단, 무장하지 않은 기독교인의 순례자는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다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는 협정이었습니다. 

 

 

4차 십자군

13세기의 유럽 전역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각국의 혼란이 일고 있던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을 다시 주장했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합의하여 십자군이 결성되었습니다. 처음 목표는 성지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 이집트였어요. 하지만 예상 인원보다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인원만으로는 도항비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도항비를 면제해 주는 대신 헝가리 왕국 차라로 떠날 것을 조건으로 삼았고 십자군은 이를 수락합니다. 차라는 사실 베네치아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도시인데 베네치아의 통치를 거부하고 헝가리의 통치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위한 원정을 가게 된 것입니다. 교황의 명령에도 불복종한고 엔리코 단돌로는 차라의 도시들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쫓아냈습니다. 

 

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는 자신의 큰아버지이기도 한 비잔티움 왕 알렉시우스 3세를 몰아내고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의 제위를 찾아 달라고 십자군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면 군사는 물론 콘스탄티노플도 로마 가톨릭이 주도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제안도 함께하죠.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노 3세가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던 제안입니다. 그런데 십자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전쟁은 이미 종교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의 행운이 뒤따랐어요.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착각한 비잔티움 시민들의 격렬한 불만 표출에 겁을 먹은 알렉시우스 3세가 출행랑을 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이 알렉시우스 4세를 맞아줌으로써 십자군은 도시에 입성했습니다.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의 아버지를 다시 제위에 앉히고 그도 동동 황제로 임명했어요. 하지만 알렉시우스는 십자군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 것이었으니까요.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시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거두어 십자군에게 지급하려 했고,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까 두려워서 십자군을 되돌려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양측의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어요. 

 

불만이 폭발해 왕권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고, 알렉시우스 무르주플루스는 귀족들과 규합해 스스로 알렉시우스 5세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렉시우스 4세와 그의 아버지를 살해했어요. 십자군은 즉시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미 첫 번째 경험이 있었던 십자군은 유리한 곳을 알고 있었어요. 마침내 십자군이 승리하자 도시에서는 무시무시한 대 학살과 방화, 끔찍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 예술작품이 파괴되었어요. 베네치아인들은 보물을 자국으로 빼돌리기도 했습니다. 약탈이 끝나자 십자군은 그것을 나누고 자신들의 황제로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선출합니다. 보두앵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황제가 되었고 이로써 라틴제국이 건국된 것입니다. 교황은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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