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합지졸의 군중 십자군을 물리치고 방심하고 있던 이슬람 술탄국은 니케아를 빼앗겼습니다. 당시교황 우르노바 2세와 분쟁관계 였던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와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는 공식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귀족들이 이 모험에 동참했어요.
도릴라이움 전투
니케아를 함락한 십자군은 비자티움이 이 도시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키자 불신을 갖고 니케아를 떠났습니다.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노르만인 선두 부대가 투르크 경기병대에게 습격당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본 부대가 도착하자 투르크족은 후퇴했어요. 이 전투후 셀주크 투르크는 십자군과의 교전을 피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군은 8개월만에 안티오키아를 고성했지만 굶주림과 갈증, 질병으로 전력은 쇠약해졌고 전쟁 자원도 부족해 도시를 함락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도 십자군을 막아낼 수 없을 만큼 약했습니다. 결국 보에몽이 수비병을 끌어들여 성문을 열었고 안티오키아 성에 입성한 십자군은 성안에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첫 공격은 실패하고 맙니다. 십자군은 전투중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자원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부의 십자군은 성지순례가 완료되었다고 판단하고 유럽으로 돌아갔습니다. 성지에 남은 사람은 로드프루아와 병사들뿐이었죠. 이렇게 제차 십자군의 성공은 기독교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유대인 학살과 안티오키아의 학살에 비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와 기독교 도시들은 두 종교가 공존하는 상태로 유지되었습니다.
2차 십자군
하지만 1128년 모술의 총독이 알레포를 함락하고 이어서 1144년 에데사를 함락하면서 서유럽은 다시 위기를 느낍니다. 이것이 제2차 십자군 소집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루이7세와 독일의 콘라트3세는 각 나라에서 군대를 동원해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향했지만 승리의 소식을 전하지는 못했죠. 이때도 유대인 학살이 자행됩니다. 유대인들이 성지 탈환을 위한 재물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말이죠. 2차 십자군은 소아이스 등지에서 패배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누르 앗 딘에게 패하고 다무스쿠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군 전쟁(3)- 제5차 십자군, 제6차 십자군 (0) | 2021.10.15 |
---|---|
십자군 전쟁(3)- 제3차 십자군, 제4차 십자군 (0) | 2021.10.14 |
십자군 전쟁 (1) 시작 - 11세기 (0) | 2021.10.12 |
노르망디 공작에서 잉글랜드의 왕이된 정복왕 윌리엄 (0) | 2021.10.08 |
바이킹 시대 (0) | 202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