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원정대와 이슬람 군대가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두 종교의 성지가 있는 지역을 탈환하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레반트(Levant)는 역사적으로 근동, 팔레스타인 (가나안), 시리아, 요르단, 레마논 등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지리적 위치보다는 문화나 역사를 아울러 가리키는 용어이다. 지리적 위치는 대략 지중해 남쪽으로 아라비아 사막, 동쪽으로 북서 이라크를 경계로 한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
무함마드가 예언자로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교를 창시하였고 632년 사망까지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시켰습니다. 이에 아랍인들은 7-8세기 동안 팽창 정책으로 급속이 지경을 넓혀갔고 637년 예루살렘도 그들에게 함락되었죠. 곧, 이슬람의 세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관용정책을 쓴 이슬람은, 유럽인들의 성지 순례도 허용하고 무역과 정치적 관계도 이어갔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다양한 문화는 평화로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투르크 족이 서쪽으로 몰려들면서 관계는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비잔티움은 그 명성만은 아직 건재했습니다. 그런데 셀주크 제국이 비잔티움 근교를 점령하며 투르크족들을 이주시키고 정착 시키는 것을 이유로 비잔티움의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071년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제국간의 만지케르트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전투에서 투르크족은 비잔티움 군대를 대패시켰습니다.
8세기 우마이야 왕조에게 정복당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이사벨 여왕이 재정복 하는 레콩키스타를 시작으로 레온-카스티야도 톨레도를 탈환하며 레콩키스타 운동이 활발해집니다. 이렇게 여러 지역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중에 1054년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사제 서임권이 교황에게 있느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있느냐를 두고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임권 투쟁 중 교황 우르노바 2세는 로마 밖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했던 교황은 무슬림으로부터 '성지를 되찾자'라는 명분으로 선동했고 교회는 이에 엄청난 호응을 보냅니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 - 11세기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아나톨리아 지역을 빠르게 점령하고 있는 셀주크 투르크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원조 요청을 했고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린 성직자와 평신도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회의에서 이를 주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회의에는 약, 3000여 명의 성직자가 첨석 하였고 교황은 서방 그리스도 교회가 이슬람에 의해 정복당한 성지를 해방시키고, 이슬람 제국의 공격에 위험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선동에 서유럽의 모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했고, 십자군에 참여한 의용병들은 공개적으로 면벌부를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클레르몽 공의회 직후 은둔자 피에르는 수천 명의 기독교 빈민들을 이끌고 나타났고 이들을 오늘날 군중 십자군이라고 부릅니다. 은둔자 피에르는 예루살렘 탈환하여 임박한 말세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군중 십자군은 동로마에 도착한 뒤, 귀족들을 기다리라는 알렉시오스 1세의 충고를 무시하고 니케아로 쳐들어갔다가 투르크족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게 됩니다.
클레르몽 공의회 : 1095년 11월 18일-28일까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합동 주재로 열렸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의회, 이를 주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1월 27일, 공의회 연설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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