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족의 로마제국 침략이 잦아지자 유스타니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고, 정제와 부제를 세워 사두정치체제를 시작합니다. 제국의 동족은 자신이 정제로 갈레리우스를 부제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첫번째 정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밀리아누스가 퇴위하자 사두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황제 세습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두 번째 로마로 삼고 수도를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 이 도시의 이름을 짓는데, 그것이 바로 콘스탄티노플입니다. (330년) 지금의 이스탄불 입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 (AD 307년–AD 326년)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는 로마 장군 출신으로 갈리아를 포함한 주변지역의 부황제까지 된 인물입니다. 아버지가 죽자 콘스탄티누스가 갈리아 지역의 부황제가 되는데요,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젊었을 때부터 동로마의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도와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경험 때문인지 갈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했고 지역을 다시 세우는 것에서도 뛰어나 부하들과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갔죠. 사두체제가 혼란에 빠지자, 콘스탄티누스 부황제의 추종자들은 그가 황제가 되어 서로마 지역을 통치하길 바랬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무력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막센티우스 황제를 몰아냈고 사실상 사두정치라는 명목하에 분열되어 있던 로마를 기독교라는 신앙으로 온전하게 통일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타 종교의 박해가 아닌 종교의 선택이 가능한 그의 종교 관용 정책은 기독교 박해를 끊어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 만들어진 많은 부분들에 대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황제 세습은 물론 화폐도 안정시켜고 군사 조직까지 개혁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비잔틴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게되고 그동안 침략자들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강력한 왕들이 세워지며 콘스탄티노플은 위대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습니다. 그중 가장 강력한 통치자는 역시 유스티아누스 1세입니다. 그는 황족 출신은 아니었죠. 오늘날로 말하면 금수저는 아니었습니다. 삼촌 유스티누스 1세도 황실 경비대장이었다가 후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가 황실 경비대에 있을 때 조카인 유스티아누스를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워 자신을 돕게 했죠.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죽자 유스티누스는 다음 황제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카의 도움을 받습니다. 삼촌이 황제가 된 후에도 유스티아누스는 삼촌을 도와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527년 유스티누스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유스티아누스가 황제가 됩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 테오도라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어요. 귀족이 된 유스티아누스와 평민 출신인 테오도라의 결혼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테오도라는 평생 남편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지혜롭게 도움으로써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니카 반란
고대 로마에서는 말 4마리가 끄는 전차 경주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전역에는 원형경기장이 있었고 경주팀은 4개의 팀으로 구성되어 각각 적색, 청색, 녹색, 백색의 옷으로 구별했어요. 로마제국에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시대가 바뀌며 4개의 팀은 2개의 팀으로 바뀌어 녹생당과 청색당이 남았는데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파벌을 이루며 그 권력도 대단했습니다. 오늘 날의 정당과 같이 조직을 이루고 지도자를 뽑았으며 황제는 중요한 공공사업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양측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여러번 충돌하기도 했죠.
532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경기정에서 전차경기가 끝난 후 청색당과 녹색당이 또 다시 충돌하게 되었는데요, 이때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즉각 군대를 투입해 질서를 회복했으나 이것이 니카의 반란의 시작이었습니다. 각 당의 지도자를 처형하고 감금한 것에 화가난 두 세력은 이번에는 아군이 되어 시위를 벌였고 무차별 방화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 의사당, 소피아 성당도 불에 타버렸어요.
그때 도주하려단 유스티아누스의 발목을 잡은 것은 테오도라 왕비였습니다. 황제인 남편을 꾸짖으며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말했죠. 도망쳐서 사는 것이 황제로써 죽는 일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이죠. 그녀의 지혜로운 설득에 유스티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힘을 쓰기로 마음을 먹게됩니다.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니카'란 '승리'라는 의미로 전차 경주 때에 승리를 기원하는 응원의 메세지였습니다.그런데 경기 재개 되었을 때 군중들이 양 편을 성대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황제를 향해 '니카'를 외쳤고 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유스티니아누스는 제빨리 피신하고 경주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래서 니카 반란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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