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역사의 황금기라 불리는 굽타왕조 시대는 정치적으로 엄격한 절대 왕정의 시대였습니다. 마가다 일대에서 시작되어 인도 북부를 통일했던 왕조로서 인도의 문화를 크게 발전시킨 왕조입니다. 평화롭고 풍요로웠으며 예술가들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던 시대, 학자들은 수학과 과학, 천문학에서 큰 발전을 이룩한 시대, 이번 시간에는 굽타 제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굽타 왕조
3세기 중반 사산 제국이 인더스 강으로 진출하자 쿠샨 제국이 쇠퇴하게 되고 인도 아대륙에서 신흥 중소국들이 난립하게 됩니다. 그때 마가다 지역을 시작으로 형성된 굽타 왕국은 점점 세력을 키워가며 제국의 규모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찬드라굽타 1세는 결혼과 동시에 막강한 세력과 지원들을 얻어낼 수 있었고 이러한 힘으로 주변국들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의 북부 전역을 다스리게 된 굽타 왕조입니다.
왕조 : 일정 기간 동안 한 나라를 다스린 가문
찬드라굽타는 거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마우리아 제국 시대의 행정 제도를 보안하여 실시했고, 황제를 의미하는 '마하라자디라자'를 굽타 제국의 공식적인 왕의 칭호로 사용했어요. 이를 보면 강력한 왕권과 세습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찬드라굽타 1세 이후 왕권을 잡은 사무드라굽타는 영토의 영역을 더 확장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갠지스 강 유역도 차지하는 등 큰 위세를 떨쳤습니다. 현명하고 엄격했던 사무드라굽타는 시나 음악 등 예술에도 재능이 많아 '시인의 왕'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무드라굽타가 인도의 현악기 비나를 연주하는 모습이 새겨진 주화를 보아도 그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의 연극인 데비-찬드라굽탐의 이야기를 보면 사무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2세의 공백기인 375년부터 380년까지 라마굽타라는 사람이 왕이 되어 굽타제국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카족과 전쟁이 났고 패배할 위기에 처하자 왕비를 적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으려 하자 이에 화가 난 찬드라굽타 2세가 왕비로 변장해 사카족을 멸했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성들은 찬드라굽타 2세에게 지지를 보냈고, 라마굽타는 찬밥 신세가 되었죠. 이렇게 인기가 높아진 찬드라굽타 2세가 눈앳가시였던 라마굽타는 그를 살해하려 했지만 역으로 살해당했고 찬드라굽타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은 아니라 역사성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찬드라굽타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도 세력을 떨치는 이웃나라와 혼인 동맹을 맺어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죠. 특히 바카타가 왕국과의 혼인 동맹으로 데칸 고원 지역이 굽타 제국의 영향 아래로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벵골만과 아라비아해를 이르는 광대한 지역도 차지하여 동서양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인도는 이 시기 안전한 치안을 유지하였고 형법은 가볍고 범죄는 벌금에 의해서만 처벌되었으며, 사람들은 살아있는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중국 승려인 법현이 저술한 [불국기]에 실려있습니다.
이후에도 왕위를 세습하며 그들의 평화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는데요, 잦은 침입과 전쟁으로 굽타 왕조는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틈타 속국들이 독립 세력으로 그 힘을 키워나가자 쇠퇴하고 있던 굽타 제국은 550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아잔타 석굴
인도 중서부에 위치한 아잔타 석굴은 굽타 왕조 시대에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굽타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사원은 총 29개의 석굴로 구성되었으며 반원형의 절벽을 뚫어서 만들어졌는데요, 불교가 쇠퇴하면서 아잔타 석굴도 무려 천년가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19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병사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석굴 안에는 불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데 불상의 유무에 따라 시대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또, 아잔타 석굴에는 프레스코화로도 유명한데요, 석고 위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광채가 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란색과 녹색을 차례로 사용했습니다. 2천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그 색을 잃지 않은 아잔타 석굴의 프레스코화는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해 보입니다. 발견 당시 먼지에 쌓여있던 프레스코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먼지의 보호를 받아 그 색을 더욱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었는데요, 안타깝게도 먼지를 닦아내면서 색채도 더 희미해졌다고 하네요.
쿠샨왕조 시대의 간다라 지방에서 사용된 양식을 간다라 양식이라고 부른데요, 굽타 왕조를 거치면서 간다라 양식은 인도화 되었고 그를 굽타 양식이라 부릅니다. 아잔타는 굽타 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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