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 -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페르시아 제국까지

뽀선생Kimppo 2021. 6. 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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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라는 이름은 본래 남부 이란의 한 주(州)인 파르스에서 유래했는데 그곳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가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에 의해 세워졌는데 오늘날 이란인들에게는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된 고대 바빌로니아부터, 페르시아까지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들로 구성된 제국입니다.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고 상업적으로도 좋은 위치였기 때문에 이민족들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기원전 20세기 전 수메르의 전성기를 지나 이후 100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여러 도시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중 이신이 가장 강력한 도시였고, 아모리인의 도시인 바빌론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를 정복하면서 바빌로니아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이곳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시리아와 가나안 사람들과 무역을 하였고, 바빌로니아에도 무역을 위한 아모리인의 이주지가 생기도 했습니다.

바빌론의 6번째 왕 함무라비왕 때에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했는데요, 그는 유능한 지도자였습니다. 이때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문예 부흥이 일어납니다. 이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은 법전의 편찬이었습니다. 함무라비 왕의 지시로 편찬된 법전은 인류 최초의 법전으로도 유명하지요. 법전의 사본은 수사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바빌론은 이신, 엘람, 우르크 등의 도시국가와 마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지중해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잘 나가던 고대 바빌로니아는 히타이트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카사이트 왕조가 세워집니다. 카사이트 왕조의 지배는 힉소스인이 이집트를 지배한 것과 거의 동일한 시기로 카사이트 왕조가 힉소스인이라는 추측하기도 합니다. 실상, 그들의 지배권은 축소되어 서부 아시아 지역의 대한 패권은 완전히 상실하고 아시리아의 수도 아슈르의 고위 성직자들이 스스로 아시리아 왕으로 옹립하면서 바빌로니아는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은 여전히 제국의 수도였으며 서아시아의 신성한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았죠. 성직자들은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아시리아가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도 바빌로니아는 계속해서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627년 아시리아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슈르바니팔이 죽고 다음 해에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인 나보폴라스르가 아시리아의 폭정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와 연합하여 니네베를 파괴하면서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다시 제국의 패권을 되찮게 되는 바빌로니아입니다. 이를 신바벨로니아 제국이라 칭합니다.

나보폴라사르의 뒤를 이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585년에 페니키아를 정복하는 등 다시 한 번 바빌론을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메디아의 멸망


페르시아인들은 양을 치며 사는 부족으로 메디아의 땅 끝 쪽에서 메디아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어요. 그 왕은 아스티아게스인데 어느 날 손자가 자라나 자신의 왕위를 빼앗고 페르시아의 지배자가 되는 꿈을 꾸지요. 지혜롭지는 못했던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손자를 죽이라고 명령했죠. 하지만 그가 총애했던 신하 하르파고스는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소치기에게 그 명령을 대신하게 했고 마침, 자식이 없던 소치기는 그 아이를 키우고 대신 죽은 자신의 아들을 보여주며 거짓보고를 합니다. 이렇게 소치기 부부에게서 자란 아이가 바로 키루스입니다. 기원전 549년 키루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키루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 하르파고스는 키루스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스티아게스의 군대는 왕을 배신하였고, 키루스가 엑바타나에서 왕으로 세워지며 메디아 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왕이된 키루스


기원전 547년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군대는 페르시아 제국 도시를 공격해 함락시킵니다. 이에 키루스가 대군을 모아 반격하자 군사가 적었던 크로이소스는 기원전 546년 크로이소스는 수도 사르데이스가 함락되어 키루스의 포로로 잡힙니다. 그러나 키루스는 포로 크로이소스를 자신의 옆에 앉히며 우대했습니다.

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원정을 나갔습니다. 이때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는 그의 아들 벨샤자르에게 군대의 권한을 맡겼죠.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공격했고 바빌로니아가 패하게 됩니다. 나보니두스는 난공불락의 성 바빌론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인들의 바빌론으로 잡혀온 포로들의 귀환 약속에 기대를 품은 유대인들과 왕에게 불만을 품은 사제들이 결탁하여 바빌론의 성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키루스의 바빌로니아 공격은 내부의 분열과 더불어 유대인과 같이 본국에서 포로로 잡혀온 세력들에 의해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부흥이라도 하듯 키루스가 처음 한 일은,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정복


키루스는 종교의 관용은 물론 이민족을 위한 포용정책으로 유명한 군주입니다. 성경에는 고레스로 나오는데 바빌론 유수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세우도록 칙령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군주이며 자비로운 왕으로 존경을 받았는데요, 크세노폰 등 많은 그리스인들이 그를 군주의 모범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이라는 저서 통해 키루스의 일대기를 다루며 통치 기간동안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대제국을 융화시킨 것과 피정복민들에게서 귀 기울여 배우는 그의 리더십에 대해서 저술하였습니다. 키루스의 교육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혔기 때문에 리더십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키루스

훗 날, 정복왕으로 불린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대한 스승 믿에서 교육 받았는데요, 꼬마 알렉산드로스는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읽고 자랐습니다. 키루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키루스의 무덤을 방문한 알렉산드로스는 존경의 의미로 키루스 왕의 무덤을 잘 꾸몄다고 합니다. 키루스의 무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또한 노예제도를 금한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알려져 있는 키루스 실린더에는 모든 사람이 생각과 선택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모든 개인은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영국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는 현재까지 리더십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키루스의 관용 정책으로 그 거대한 제국과 다민족을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전국에 군현제를 실시하고 도로와 역전제를 정비하는 한편, 감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순찰하도록 함으로써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로 정비와 화폐의 통일로 문화의 교류와 상업의 발달을 가져와 오리엔트는 2세기에 걸친 번영을 누렸던 페르시아 제국이었습니다.

https://youtu.be/_zwYpoHlW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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