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가는 학교를 보내지 않으면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 마음에서 놓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느 날은 아는 것 같았고 어느 날은 그 확신이 안개처럼 흐려져 버리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그렇다. 그 질문은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모르겠다. 홈스쿨을 준비하면서 ‘공부란 학습을 포함하지만 학습이 공부는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학습이 곧 공부가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공부가 진짜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더듬 더듬이라도 그 답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천재 만들기 - 고전 교육의 함정
솔직하게 말해서, 처음 고전 교육에 대한 책을 읽을 때는 고전을 읽으면 모두 천재가 되는 줄 알았다. 내 안에 거인을 깨워줄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많은 고전 입문서들은 성공한 위인들의 예를 들어주며 마치 ‘너도 읽기만 해봐, 그러면 천재가 될 거야, 너 아이도 천재 만들어야지…’라고 약장수 버금가는 썰을 풀어놓는다. 그래, 솔직히 나는 그랬다. 천재 되려고 했고, 천재 만들려고도 했다. 10대에 명문대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가는 자식을 두고 싶었고,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것을 통달한 상태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 읽은 책이 모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천재는 되지도 못했고 만들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천재 되기는 글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르고 모르는 것이 끝도 없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이게 무식한 것을 캐낼수록 부자가 된다면 난 정말 부자가 되었을 텐데… 아쉽지만 남는 것은 여전히 무식한 나 자신이었다. 여전히 무식한 내 자식이었다. 그러면서 천재라는 것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들었다. 박식 오브 더 박식한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면, 맞다, 천재는 먼 이야기이다. 하지만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캐고 또 캐내는 사람,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을 천재라 한다면… 그런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천재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재를 해석하는 관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가치에 대한 이야기)
여기서 직면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하지만 이도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원하는 것을 미화시킨다. 포장한다. 그럴듯한 말로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그 포장에 스스로도 속는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기 위해도 좋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도 좋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목적에 솔직해 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속인다면, 스스로를 속인다면 진전이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내가 가치를 두는 것이 계속 흔들리고 바뀐 것 같다. 천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로, 미래 기술에 대해서 공부하면 거기로, 신앙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거기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치가 움직인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에서도 진짜 가치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신앙적이 멋진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내 본심인지 확신을 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일까?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가짜 지식들에 대해서 알게되었다. 내가 믿는 것, 내가 가치 있다가 이야기하는 것, 내가 알고 있다 하는 것들이 사실은 내가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정답이라고 말하는 부분들, 문화 속에서 젖어든 것뿐이지, 내가 착각한 것뿐이지… 사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바뀌고 흔들렸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비슷한 영역에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나 자신은 독보적인 존재인데, 우리가 후천적으로 모두 비슷한 색깔의 사람들로 교육하면서 그 안에서 박 터지게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보면, 사실 특이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모두가 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유독 사회에 나오면 모두 같은 색을 띤다. 자신의 개성은 묻어두고, 독보적인 자신을 깎아내어 굳이 너도나도 비슷한 모습을 만들고는 비교하고, 비참하고, 비난한다.
결국 공부란 나를 찾아가는 순례길
결론은, 결국 공부란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가 아닐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각자의 개성대로 하나도 같은 사람을 만들지 않았는데, 우리는 ‘안전’이라는 안전하지 않는 선택으로 모두 같은 모습을 하기 원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지만 독보적인 나를 찾는다면 경쟁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오리지널 디자인을 찾는다면 나는 나지 너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너와 비교해 비참할 필요가 없다.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비교 대상 조차 없기 때문이다. 공부란, 내가 누구인지 찾아 나아가는 순례길이라면 대학에 간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고 멈출 수 있는게 아니다. 공부란 나를 발전시키고 내 삶에 유익을 주는 것, 또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우리의 공부가 달라질 것이다.
'찐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찐공부 9] 아이는 부모를 넘어설 수 없다, 대화가 필요한 부모와 자녀 (0) | 2022.03.23 |
---|---|
[찐공부 7] 책 읽기, 어디서부터 시작일까? (1) | 2021.08.12 |
[찐공부 6] 기초 교육 - 말하고 읽고 쓰기 (1) | 2021.08.07 |
[찐공부 5] 누가 홈스쿨러인가? (0) | 2021.08.07 |
[찐공부 4] 아이의 흥미를 닫아버리는 교육 (0) | 2021.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