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역사 이슈들

중세의 경제 - 길드, 유대인 대부업

뽀선생Kimppo 2021. 9. 2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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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에는 농민만 유일한 생산 계급으로 인식되었고 상업이나 수공업은 천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했습니다. 그중 유대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자연히 상업, 수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한 유대인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돈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으로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요. 

 

유대인에게는 상업에 대한 남다른 센스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공부하는 습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읽기, 쓰기, 계산은 분석하는 능력을 뛰어나게 했고 그들의 신앙관에 따라 약속을 목숨같이 지키는 그들의 태도는 타인에게 신뢰를 살만 했습니다. 역사상 늘 이리저리 치이며 살았던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 돕고 살았습니다. 

 

 

유대인의 대부업

기독교는 이자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의 중심이었던 교회와 수도원, 기사단은 이러한 법칙을 어기고 대부업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발각되면 이자를 되돌려주는 것은 물론, 직책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이방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해석으로 유대인들은 대부업에 종사하기도 했는데요, 중세 기독교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은 재무 관리를 주로 유대인에게 맡기기도 했습니다. 유대교는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돈을 대하는 관점 자체가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의 대부업은 날로 커져만 갔고 유대인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유대인 대부업자가 실종되거나 살해되기도 했고, 그렇게 되면 대출금에 대한 소유권이 국왕이나 영주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왕이나 영주는 대출을 할 때에도 대출에 대한 세금을 요구했고, 그러다가 보니 많은 세금을 내는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왕이나 영주는 그러한 자산을 보호하고 싶어했죠. 부유한 유대인들은 왕실 직속으로 관리되기도 했답니다. 

 

 

중세의 상인들

 

당시의 상인들은 육로로 다니며 장사를 했기 때문에 위험이 늘 산재했죠. 그들은 보호를 위해 용병들을 데리고 다녔고, 그들이 힘을 합치면 영주나 기사들도 맞서기 힘들었습니다. 상인들은 공동서약을하고 주민 자치제 코뮌을 결성해 영주와 대결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치권을 따냈고 그 결과 상인과 귀족이 주도하는 중세도시로 성장하게 됩니다. 

 

 

중세의 길드

 

길드는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가지 유럽 도시를 중심으로 장인이나 상인이 조직한 조합입니다. 길드는 사업권 면허를 받아 해당 지역의 생산권이나 상권을 독점하였는데요, 길드는 군주나 영주 등 지역의 통치자가 발급한 특허장으로 사업 허가를 받아 조직되었고 도제를 고용하여 교육시키는 방식으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길드는 도시의 판매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길드는 상품의 가격을 결정할 수 있었고, 거래 시기와 도제의 수를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상거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은 길드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중세 사회는 길드의 분업으로 사회의 여러 분야가 생성되기도 했는데요, 세계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그 이후에 세워진 옥스퍼드 대학, 파리 대학 등은 길드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이 설립하였고, 파리 대학은 길드 마스터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니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상업, 수공업 진출은 어려웠죠. 기독교인들이 꺼리는 일들,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 일들이 유대인들의 일거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노예 무역의 중간 상인 역할이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슬람 지역은 기독교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유대인 중간 상인이 필요한 곳이 었어요. 7세기 지중해를 장학한 이슬람과도 무역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요, 향신료, 견직물 등이 수입되었고 모피, 노예 등이 이슬람 세계로 수출되었습니다. 

 

출처 : 이 글은 홍익희 선생님의 [유대인 이야기]를 정리 요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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