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마그누스의 '마구누스'는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프랑스어인 '샤를마뉴'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죠. '위대한 샤를'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요? 위대하다는 수식어 붙게 된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습니다.
샤를마뉴의 통치
샤를마뉴는 즉위 초부터 반란이 일어납니다. 아키텐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했고,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발생한 게르만족의 반란이 그것인데요, 이를 강력하게 진압하였습니다. 40년이라는 긴 통치 기간 동안 샤를마뉴는 사방을 점령합니다. 작센을 정벌하고, 분리독립을 완전하게 진압하여 복속시키는 한편, 북이탈리아 랑고바트르 왕국을 멸망시키고, 사라센을 토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원정에서는 참패를 맛보기도 했어요. 사실 이전 통치자 피핀이 죽자 샤를마뉴와 동생이 왕국을 분할하여 통치했어요. 하지만 동생마저 죽자 샤를마뉴가 단일 통치자가 되는 과정에서 동생의 편에선 왕국들을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성문화된 법전을 만들었고,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등 포용적인 정책을 썼습니다. 또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샤를마뉴는 그의 왕국을 더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더욱더 번성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수도사들에게 성경 사본을 만들게 했고, 수도사들이 여러 지역을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기도 했습니다.
샤를마뉴는 문명화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문학 기술을 가르치고, 아이들의 교육에도 신경 쓰며 꼭 교회에 보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어요.
샤를마뉴의 원정
샤를마뉴는 전쟁을 많이 했어요. 더 큰 왕국, 더 강한 왕국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30년간 전쟁을 했어요. 그는 승리를 거두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 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라'라고 협박했습니다. 그의 왕국은 점점 영토를 확장하며 그 세력도 강력해져 갔어요. 로마시대에 사용했던 도로를 재정비하고 영토 곳곳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서로마 황제즉위
799년 교황 레오 3세는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샤를마뉴는 교황을 지워하고 호위군까지 붙여서 이탈리아로 돌려보내죠.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사실상 남아 있던 동로마 제국이 곧 로마 제국이었으니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게 간섭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라면 그 일을 해낼 수 있어 보였어요. 이러한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인 샤를마뉴는 800년, 로마에서 교황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성탄절 미사가 열리자 로마인들은 샤를마뉴를 황제라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어주고 카룰루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서로마 황제로 임명합니다. 이것은 곧,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에서 이를 인정할리 없었죠.
당시만 해도 프랑크 왕국은 비잔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800년 경 샤를마뉴가 옛 로마 제국의 서부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한 것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받은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대내외적 통치권을 견고하게 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며 이후 유럽 국가들의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카롤링거의 르네상스
샤를마뉴는 794년 독일 북서부의 아헨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대의 로마 제국의 번영을 부활시키고자 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정치와 행정의 중심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왕실 도서관을 설립했고,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는 궁정 학교를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성당 학교에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샤를마뉴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황제로서 그 전통을 기록하게도 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반영하여 수정되었고 모든 계층에게 내려진 특수한 법령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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