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투르크가 영토를 넓히며 확장하는 동안 유럽은 자기들끼리 전쟁으로 바빴습니다. 이 전쟁의 이름은 '30년 전쟁'입니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그의 제국을 동생인 페르디난트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나누어 물려주게 됩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물려받았고 페르디난트는 독일에 있는 카를의 소국들을 물려받고, 형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페르디난트가 죽은 후에는 아들 막시밀리안이, 막시밀리안의 아들 마티아스에게 대물림되다가 마티아스가 자식 없이 죽자 독일의 소국들은 그의 사촌인 페르디난트 2세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시 독일은 작은 나라들이 모여서 이루어졌고 각 소국들은 강력한 군주가 다스렸는데, 군주에게는 각 나라가 가톨릭일지 프로테스탄트일지 결정할 권한이 있었어요.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는 열열한 가톨릭 신자였고 즉위하자마자 프로테스탄트 예배를 법으로 금지시키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쟁의 시발점,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보헤미아 지방의 중심 도시 프라하에 모여 페르디난트에게 대항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드난트 2세는 당시 독일을 두 대신에게 맡겨 놓고 여행 중이었습니다. 분노한 프로테스탄트 군중들은 겁먹고 도망치는 두 대신을 따라 프라하 궁성으로 쳐들어갔고, 그들이 숨어있던 방을 찾아내 두 대신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거름더미 위에 떨어져 다치지 않았죠.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신들이 페르디난트의 지배를 벗어났다고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는 고집 센 사나이였죠. 독일이 가톨릭 국가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 도움을 청했고 두 나라의 군대가 보헤미아로 진군해 프로테스탄트 반란군을 순식간에 무너트려 버렸습니다. 페르디난트는 반란군의 지도자들을 잔인하게 처벌했고, 독일 소국들의 군주들 중 일곱 명의 선제후를 불러 강제로 자신을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페르디난트 2세의 행동은 더 큰 혼란을 불러오게 되었어요. 프로테스탄트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 북부의 소국들도 그가 강압적으로 독일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웃나라인 영국과 덴마크도 그들을 견제했습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와 손잡은 페르디난트가 영국과 덴마크를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와 영국이 끼든 30년 전쟁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독일로 진군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독일의 영토를 탐내고 있었죠. 제임스 1세가 보낸 영국군도 합세했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도 군대를 모아 합세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페르디난트의 군대를 이끌고 가 크리스티안 4세의 군대와 맞붙었습니다. 덴마크, 영국,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군대는 박살이 났어요. 페르디난트의 군대는 곧바로 진격해 덴마크를 점령했습니다.
스웨덴이 끼어든 30년 전쟁
스웨덴의 프로테스탄트 국왕 구스타프 2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웨단 바로 위가 덴마크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발렌슈타인이 쳐들어 오기 전에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스타프의 군대는 최초로 동일한 군복을 입은 군대였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알아보고 훨씬 수월했어요. 구스타프는 직접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발렌슈타인의 군대를 공격했고, 공격받은 페르디난트의 군대는 덴마크를 버리고 독일로 도망갔습니다. 이번에는 구스타프가 독일의 국경선을 넘어 진격했어요. 곧바로 페르디난트에게 대항하는 독일 소국의 군주들이 합세해 주었고 독일의 수도인 빈으로 빠르게 진격했습니다. 이 연합군을 '프로테스탄트 연합군'이라고 부릅니다. 승리가 확실해 보였죠. 하지만 부대의 대열을 가다듬은 독일 군대는 프로테스탄트 군대와 접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가 전사했습니다. 총사령관을 잃은 스웨덴 군대는 급격하게 무너졌고, 스웨덴 병사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어요.
이 전쟁이 일어난지 16년이 되자, 독일 프로테스탄트 군대의 지도자들은 페르디난트와 평화 조약을 맺고 싶어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17년 되는 해, 독일의 군주들이 그의 나라가 어떤 종교를 따를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약이 체결됩니다. 페르디난트 2세가 왕이 되기 전 상황으로 돌아간 허무한 싸움이었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독일은 황폐해져 버렸죠.
프랑스의 수상 리쥴리외의 야망으로 다시 불붙은 30년 전쟁
리슐리외는 이 전쟁으로 힘을 잃은 페르디난트를 무찌르고, 신상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빼앗아 프랑스 국왕에게 바치고자 했습니다. 17년 만에 겨우 조약을 맺고 전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곧이어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가 다시 이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 오랜 전쟁에 지친 페르디난트도 죽고, 리슐리외도 죽자 다시 각 나라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평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4년이 더 지나야 했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것을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합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영토의 일부를 스웨덴에게 주었고, 독일의 소국들은 자주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독일 왕국은 이렇게 분열되었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프랑스와 스페인은 11년 동안 그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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