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세계사] 근대편

[세계역사 이야기] 근대 37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의 독립과 볼리바르

뽀선생Kimppo 2022. 4. 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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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는 독립의 물결이 일고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의 해방자로 불리는데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이뤄낸 독립도 잠깐, 권력을 쥔 볼리바르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네수엘라의 해방자 볼리바르

남아프리카에서 스페인 이주민의 자녀로 태어난 자들을 ‘크레올’이라 불렀습니다. 크레올은 장국이나 관리가 될 수는 없었어요. 이러한 불공평한 처사 때문에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크레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봤지만 실패하고 말았죠.

 

볼리바르는 유럽 여행을 하며 유럽에 점점 커져가고 있는 자유의 물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존 로크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책도 접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독립을 쟁취한 식민지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베네수엘라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공격해 왕을 끌어내리고 그의 형 조제프를 통치자의 자리에 앉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스페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볼리바르는 크레올들을 이끌고 수도인 카라카스로 갔습니다. 그는 스페인 총독을 몰아내고 베네수엘라의 자유를 선언했어요. 그는 군대의 대령이 되었고, 이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미란다가 돌아와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남아메리카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죠. 아르헨티나는 이미 독립을 선언했고, 곧이어 파라과이도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은 베네수엘라를 독립시킬 생각이 없었어요. 곧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왔습니다. 겁을 먹은 베네수엘라 군대는 항복하길 원했고, 총사령관인 미란다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갈 궁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볼리바르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도망쳐서 뉴그라나다로 갔어요.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곳은 이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곳이었죠. 뉴그라나다가 지원해준 백 명 남짓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베네수엘라로 간 볼리바르는 국경 지대에 있는 스페인 군대를 공격해 나갔습니다. 곧, 군대에 들어와 함께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죠. 그렇게 2년쯤 싸움을 지속하며 다시 수도인 베네수엘라로 들어갔고 1813년 다시 한번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때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해방자’라고 외치며 그를 환영했는데, 그때부터 해방자는 볼리바르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언을 한다고 독립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스페인 사람들은 베네수엘라 남부에 사는 ‘라로네’가 반란을 일으키게 조장했습니다. 그들은 이주해서 부유하게 살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인 크레올들을 미워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라로네와 힘을 합한 스페인 군대는 볼리바르를 무찌를 수 있었죠. 볼리바르는 다시 자메이카 섬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무렵 스페인은 나폴레옹 군대를 몰아내고 페르난도 7세가 국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보내 다시 남아메리카의 식민지를 꽉 잡았습니다. 해방자 볼리바르는 망명자로 살아가게 되었어요.

 

볼리바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다른 식민지들을 독립할 수 있다고 믿고 ‘자메이카로부터의 편지’라는 제목의 글을 써 그의 포부와 계획을 알렸어요. 그의 글을 읽은 자들은 남아메리카를 미국과 같이 거대한 강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죠. 그러나 볼리바르는 국민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해하는 대통령이 아닌 강력한 왕권을 가진 영국과 같은 정치 체제를 갖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볼리바르는 그곳에 통치자가 되고 싶었어요. 볼리바르는 아이티 국왕을 만나 도움을 줄 것을 약속받았고 아이티는, 배와 군사들을 지원받을 수 있었어요.

볼리바르의 군대는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갔고 마침내 스페인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독립한 나라들은 한 사람의 대통령의 통치를 반대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독립을 이뤄낸 볼리바르도 때론 권력을 갖게 되자 독재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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