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초 산업혁명이 진행되며서 대자본이 필요해졌고 각 국가간의 무역으로 대금결제 시스템이 요구되었습니다. 당시는 유럽이 나폴레옹전쟁에 휘말려 있을 시기였습니다. 이때에 독일출신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그의 다섯 아들을 유럽 5대 도시에 보내 어음결제은행을 세웠어요. 프랑크프르트, 빈, 런던, 나폴리, 파리가 그 도시였죠. 은행 이름은 로스차일드 상사였습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마이어 암셀 로스타일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듯으로 랍비를 키우는 학교에서 교육받았습니다. 유대인에게 랍비가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그의 부모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후 친척들의 도움으로 유대계 은행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은행업을 배웠고 학교에서 배운 탈무드는 그의 생각에 기반이 되었어요. 마이어 암셀 로스타일드는 7년간 다양한 금융업을 경험하고 배워나갔고 1764년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가 하던 고물상, 골동품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대부업과 옛날 동전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마이어는 왕국이나 공국들이 서로 다른 화폐를 쓰는 것을 보고 게토 안에 환전소를 열었습니다. 환전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진귀한 동전과 골동품을 수집해 갑부들을 그의 고객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그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자인 헤센 카젤 공국의 빌헬름 왕자와 관계를 맺었고 그의 재무관이었던 갈 부데루스와 관계를 쌓으며 빌헬름 공의 런던 채권을 할인하기도 했습니다. 로스차일드가 궁전의 금융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곧 마이어는 궁전과 거래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어용상인이 되었고, 어용상인되자 어이든지 쉽게 여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빌헬름 공이 1785년 독일 헤센 공국의 왕위를 물려받아 빌헬름 9세가 되었스빈다. 엄청난 유산도 상속받았지요. 그 동안 신임을 받고 있던 마이어는 최고의 궁전상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귀족들이 좋아하는 고급 상품들의 거래로 부를 축적했어요. 그리고 마미어는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귀족들에게 물건을 싸게 주면서 신용을 쌓아갔습니다. 마이어는 빌헬름이나 귀족들이 나설 수 없는 일들을 도맡아하며 빌헬름 9세를 위해 프랑크푸르트 은행들과 빌헬름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793년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한 영국은, 다른 동맹국들이 모두 프랑스와 조약을 맺으며 돌아섰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비 마련을 영란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어요. 이 때문에 영국에서 금이 계속해서 유출되었고 겁먹은 사람들이 은행에서 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금값은 계속 치솟았습니다. 영란은행은 금 유출이 계속 많아지자 1797년 은행권을 금으로 교환하는 것을 정지했는데 이는 1821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마이어 의 셋째 아들 마이선
마미어의 셋째 아들 마이선은 면직물을 구입해 독일 게토에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 뒤엔 다른 물품들을 보내면서 로스차일드 상사는 많은 돈을 벌게되었어요. 그리고 사업은 점차 커져갔고 마이선은 부가가치를 더 높이는 산업을 시작합니다. 네이선의 거래 방식은 3개월 신용거래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제조업의 유통에 금융거래가 도입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제조업이 점점 치열해 지면서 직물 산업보다 금융업이 더 이윤이 높다는 것을 알게된 네이선은 영국에서 금융업을 시작하기로 생각합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팔아야 했는데 이미 좋은 평판을 받오 있던 네이선은 국제 환어음 인수 가문으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주무대를 런던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금융업을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채권, 금, 주식 거래가 그의 주특기 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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