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걸리버는 여러 곳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는 소인국인 릴리펏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릴리펏은 굽의 높이나 계란을 어느 쪽으로 깨느냐의 문제로 대립하고 전쟁을 하기도했다. 왕은 거인인 걸리버를 이용해 적국을 속주로 만들려 했지만, 걸리버는 거절했고 이 일을 시작을 황제의 신임을 잃게되었다. 그리고 그를 반역자로 몰아 벌을 내리려는 음모를 알게되자 그는 릴리펏의 적국을 이용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릴리펏의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것을 이유로 오랜 전쟁을 하고 대립하고 있는 시대를 그리고 있다. 걸리버는 적국으로 가서 수많은 적의 배들을 나포해왔지만 어느새 그의 공로는 사라지고 변절자로 낙인찍혀 처형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나는 한번은 강력하게 저항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 몸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는, 온 제국의 힘을 다 합쳐도 나를 패배시키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큰 바위 몇 개만 가져와서 손쉽게 수도를 박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하여 포기했다. 내가 황제에게 한 충성 맹세, 내가 그에게서 받은 혜택, 그가 내게 수여한 나르닥이라는 높은 직위 등을 생각할 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궁정 신하들의, 고마움을 정반대로 표시하는 방법을 아직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궁정 신하들처럼 뻔뻔하게 폐하가 현재 내게 부여하려는 가혹한 처사는 과거에 내게 베풀어 주었던 혜택을 모두 상쇄해 버렸으니, 나는 이제 폐하에게 아무 빚진 것이 없다고 내뻗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들을 쓸어버릴 힘도 있었기 때문에 강력히 저항해 볼 것도 생각해봤지만, 이러한 끔찍한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그가 받은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의 공로를 금새 잊고 그를 처형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고관대작들의 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돌아온 주인공은 다시 선의로 배를 탔는데, 이번에는 거인들의 나라 브롭딩낵에 도착하게 된다. 거인국은 사방이 막혀 타국과의 전쟁은 없었지만 권력 분쟁이 있었고 내전 때문에 군대도 있었다. 거인들은, 가까이 볼수록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불쾌하기 까지 했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커다란 쥐, 벌, 새, 원숭이들의 공격으로 위기해 처한다. 그때마다 걸리버는 자신의 작은 칼을 꺼내 용감하게 싸우지만, 이 모습은 흡사 자연을 상대로 하는 싸움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국왕은 주인공의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모두 아주 해로운 해충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주인공은 환심을 사기 위해 화약 만드는 기술을 말해주었지만, 왕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의 사용에 대해서 듣고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나같이 무능력하고 비천한 벌레(이것은 국왕의 표현이다)가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생각을 품을 수가 있는지 경악했다. 또 그런 파괴적인 무기가 가져오는 유혈과 살육을 묘사하면서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전혀 동요하는 빛 없이 말하는 것도 괴이하다는 것이었다. 국왕은 그런 파괴적인 무기는 분명 인류의 대적大敵인 사악한 악마가 최초로 만들어 낸 무기였을 거라고 말했다. 왕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그는 예술과 자연의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겁게 여기지만, 그런 끔찍한 무기의 비밀을 아느니 차라리 그의 왕국 절반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를 비천한 벌레로 부르고, 그의 조국과 인류 전체를 무시하는 브롭딩낵 역시 정도의 차이일 뿐, 걸리버의 조국과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그 또한 크기가 큰 야후가 지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꿈꾸던 걸리버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곧 그의 운명을 따라 다시 배를 탔고 이번에는 하늘 위에 떠있는 라퓨타에 가게 되었다.
라퓨타 사람들은 온통 깊은 생각에 빠져 치기꾼이 없다면 일상 생활도 불가능했다. 음악과 수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현실적인 학문을 터부시했던 그들은 학술원을 만들어 기이한 것들을 연구해 세상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세상을 황폐화 시킬 뿐이었다. 주인공은 라퓨타 아래의 육지로 내려와 글럽덥드립에서 고대의 현인들을 만났고, 스트럴드브럭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자들도 만났다. 그 경험을 통해 걸리버는 인류가 퇴보하고 있는 것과 그러한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된다면 그 일 또한 얼마나 끔찍한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위증, 억압, 매수, 사기, 뚜쟁이질 등의 결점은 그나마 그런대로 용납할 수 있는 악행이었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정상 참작할 만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색과 근친상간을 하고, 아내와 딸에게 몸을 팔게 하고, 나라나 군주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독살하고, 무고한 자를 파멸시키고자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여 부와 명예를 쌓았다는 고백을 듣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여기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지만, 그 결과 고위직 인사들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나의 존경심은 다소 시들해져 버렸다. 우리 하급자들이 저 숭고한 위엄을 지닌 고위직 인사들을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나 실상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온 걸리버는, 이번에는 선장으로 다시 조국을 떠났고 선원들의 배신으로 후이늠국에 버려지게 되었다. 후이늠국에서는 이성을 가진 말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나라에서는 인간은 야후라 불리며 불쾌하고 야만적인 모습의 짐승으로 살고 있었다.걸리버는 점차 후이늠의 고결한 이성과그것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질서에 매료되었고 야후를 경멸하게 되었다. 후에 걸리버는 야후라는 이유로 후이늠국에서 쫓겨나 집에 도착했지만, 가족들 역시 야후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없었다. 하지만 2년간 후이늠들과의 교제로 많은 악을 멀리하게 된 걸리버는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인류에게 정보를 알리고, 또 그들을 가르치려는 지극히 고귀한 목적에서일뿐이다. 나는 극도로 뛰어난 후이늠들과 그토록 오래 대화를 나눴으므로 그것 자체가 하나의 강점이 된다고 본다. 따라서 나의 우월함을 어느 정도 주장한다고 해도 오만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돈을 벌거나 대중의 찬사를 받자고 글을 쓰지 않았다.
릴리펏, 브롭딩낵, 라퓨타를 여행한 걸리버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게되었다. 아주 작은 인간이든, 큰 인간이든, 이성이 매우 발달한 인간이든 모든 인간은 야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도 야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온 조국은 그저 야후들이 통치하는 곳일 뿐이다. 야후는 악한 본성을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서 이성이란 포장으로 악한 본성을 가려보려하지만 그 이성은 오히려 악을 더 악하게 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하지만 후이늠의 순수한 이성을 경험한 그로써는 다시 예전의 야후로 돌아갈 수 없다.
이처럼, 저자는 주인공인 걸리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우리가 악한 본성을 타고난 야후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첫 단추인것이다. 걸리버가 릴리펏, 브롭딩낵, 라퓨타를 여행하며 인간의 추악한 본성에 대해서 점차 알아가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후이늠에서 그는 인간으로써는 판단 조차 할 수 없는 순수한 이성을 경험하게된다. 그 순수한 이성은, 야후라는 존재가 곁에 있어서 더욱 빛을 바란다. 걸리버는 그들과 오래 대화를 나눈 것 자체로 자신이 강점을 가졌고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야후가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는 악덕과 어리석은 짓만 한다면, 내가 다시 야후 종족과 조화를 이루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변호사, 소매치기, 대령, 천치, 영주, 노름꾼, 정치인, 뚜쟁이, 의사, 증인, 위증교사자僞證敎唆者, 대리인, 반역자 등을 본다고 해도 전혀 화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사물의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 병이 들어 기형으로 뒤틀린 자들이 교만을 떠는 걸 보면, 그 순간 나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만다. 어떻게 동물이 저런 악덕과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이성적인 동물의 주된 특징인 모든 탁월함을 풍성하게 갖춘 저 현명하고 고결한 후이늠의 언어엔 교만의 악덕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
걸리버는 야후가 천성적으로 어쩔 수 없는 악덕과 어리석은 짓만 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봐줄만 하지만 야후이면서 교만을 떠는 것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이늠을, 이성적인 동물의 주된 특징인 모든 탁월함을 풍성하게 갖춘 동물이라고 표현한다. 어리석은 야후인 인간은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고 이상적인 이성을 향해 걸리버와 같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야후가 후이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걸리버 정도로, 우월한 야후가 될 수 있다고!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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