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후추와 향신료였습니다. 후추와 향신료 때문에 대항해 시대가 개막되었고 식민지 건설 경쟁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향신료의 시대였죠. 14기 초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오스만제국이 힘을 써서 유럽과 도방의 무역길을 차단했습니다. 그러자 유럽에서 후추의 가격은 폭등했죠. 신항로 개척이 부득이해 졌습니다. 하지만 콜롬버스가 찾아낸 것은 인도는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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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쿠 다가마가 연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시대
1498년 바스쿠 다가마의 포루투갈 함대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습니다. 인도에는 후추 외에도 수공업이 발달한 나라였죠. 캘리컷의 무명은 아주 고급 제품이었고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스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 직물에 캘리코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에서 가져온 상품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들은 커다란 이윤을 남길 수 있었어요. 신항로의 개척으로 동양의 물건들이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들어오게 되자 포르투갈 상인들은 엄청난 수익을 얻었습니다. 이 때부터 서구 열강들은 동양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포르투갈은 1505년 인도에 총독을 두고 식민지 개척 전략을 본격적으로 폈나갔습니다.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시대가 열린 것이죠. 1517년에는 마카오를 선점했습니다. 마카오는 거대한 비단 시장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중계무역으로는 아주 좋은 입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은 16세기 동방무역을 독점하면서 거대한 부를 얻었어요.
경쟁자 스페인
1519년 경쟁자였던 스페인의 마젤란의 스페인 함대가 세계 일주에 성공합니다. 스페인도 인도를 찾게 된것이죠.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지게되는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 일 때문에 16세기 말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대체하는 동인도 항로의 주인고이 되고 말았습니다. 네덜란드의 동양 진출이 활발했는데 이는 17세기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동남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 자국의 동인도회사에 아시아 독점무역권을 보장했습니다. 식민지 개척과 관리를 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고 이때 필요한 협상의 권리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는 국가 차원의 권위를 위임한 것이었어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한 나라에 비견되는 막강한 권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7세기 중엽에까지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게 되는데 이는 폭력적인 점령으로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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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운행기간을 단축시키는 호르무즈 항구
162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호르무즈 해협의 호르무즈 항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항구는 1515년 포르투갈이 선점하면서 동인도 무역을 독점하였던 곳이었는데, 고대부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던 곳이죠.
호르무즈는 해협은 1년 내내 교역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인도양 남단을 멀리 횡단해 아프리카를 돌아 포르투갈로 다시 갈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포르투갈이 호르무즈를 지배하면서 대상들에게 동방물품을 바로 전할 수 있게되었어요. 본국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선박 운행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622년 영국과 패루시아가 호르무즈를 탈환하면서 호르무즈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유 무역항이 되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동아시아 교역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본 포스팅은 홍익희 선생님의 유대인 이야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