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최초로 자리 잡고 생활하기 시작한 터전은 만주 일대를 비롯하여 한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구석기시대로 추측된다. 당시 빙하기가 끝나가는 시기로 해수면이 매우 낮아 중국, 일본 등과 육지로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점차 기온이 올라가고 해안선에 변화가 생기자 같은 사람들은 양식을 찾아 이동하는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구석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을까?
충북 단양의 금굴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 약 70만 년 전부터라는 것이 설득력 있다. 덕천 승리산 단양의 상시 동굴에서는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두 가지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는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 구석기에 이어 신석기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 해안가 저지대 강가에 정착해 수렵과 어업,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 곳에 정착해 식량을 생산하고 저장하는 등 그곳에서 점차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의 민족을 형성했던 핵심체가 되었다고 짐작된다.
고대 중국에서는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고 불렀다. 이는 동쪽 오랑캐라는 뜻도 있지만 '활 잘 쏘는 큰 민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방계 유목민의 압력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 요서와 요동 지방을 거쳐 동삼성 일대와 한반도로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살던 지역은 매우 광범위하지만 자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통일한 국가가 세워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우리나라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구석기시대는 석기의 모양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적인 곳은 옹기 굴포리(함북), 상원 검은모루 동굴, 덕천 승리산 동굴(평남), 공주 석장리(충남), 청원 두루봉 동굴, 단양 수양개 유적(충북), 연처 전국리(경기) 등이 있다. 특히 단영 금굴의 경우 그 연대가 7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들 지역에서 사람의 두개골과 포유동물의 뼈나 석 기류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유적지에서 나온 동물의 뼈는 추운 지방에 사는 북방계와 더운 지방에 사는 남방계 동물, 지금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동물들도 섞여 있어 그 당시의 자연환경과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구석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뗀석기를 이용하여 동물을 사냥, 나무 열매와 뿌리르 채집하며 살았다. 그 후 기술이 발달되어 예리하게 날을 세운 도구들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의 구석기 인들은 동굴이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생활, 구석기 후기의 집터는 기둥자리, 담자리 및 불 땐 자리가 남아 있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영워한 것으로 보이는 데 가족단위로 무리를 이루어 유목 생활을 하였다. 지도자는 존재했으나 평등한 공도체 생활이었다.
또한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뿔 등을 이용하여 조각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사냥을 주로 했던 그 당시 사람들이 동물들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로 새겨넣은 것을 보인다.
빙하기가 지나가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환경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는데 이 시기를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시기로 본다. 다. 이 시기를 중석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 등에 꽂아 넣어 톱이나 낫처럼 활용한 예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석기을 갈아 다듬에 쓴 신석기는 대게 기원전 6천 년 경으로 본다. 이 시대 사람들은 돌을 갈아서 다양한 형태의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한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서 만든 토기를 사용, 음식물을 요리하거나 저장하게 되어 생활이 발전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고 저장했음을 보여준다. 안정적이고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였다. 동괭이, 돌 삽, 돌보습 등이 출퇴되어 다양한 농기구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장착 생활을 하기 되자 움집이 일반화되었다. 집터 바닥은 원형, 둥근 방형이었고 중앙에는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있었다. 움집은 매우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는데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고 출입문 옆에 화덕, 저장 구덩이 등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들을 보관하였다. 부족 공동체를 이루었던 신석기시대 사회는 혈연 중심으로 씨족 을 기본 구성단위로 하였다.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 자체를 신성시하는 애니미즘이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태양과 물에 대하 숭배가 가장 컸다. 그와 함께 죽은 사람의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 사상이 싹텄다. 인간과 영혼을 연결해 주는 재인 무당과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이 널리 퍼지기도 했고 동식물과 그것을 연결시켜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나타났다.
이 시대의 예술품으로는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조개 껍데기 가면, 동물 모양 조각품, 장신구 등이 출토되고 있다.
-본 글은 [이야기한국사] 이현희, 교양국사연구회의 글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