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헨조다로, 하라파
화려한 도시가 보입니다. 이곳에는 집집마다 있는 목욕탕과 수세실 화장실 집 앞에는 큰 길이 잘 깔려 있고, 길 옆에는 대중목욕탕도 있습니다. 저쪽에는 커다란 곡물 창고도 보이네요. 기원전 2,500년 전의 한 도시의 모습이랍니다. 지금으로부터는 5,500년 전의 도시라고 믿기지 않는 모습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해서 이집트 문명, 그리고 인더스 문명이 시간 차를 두고 발생했는데요, 그중 인더스 문명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생한 인더스문명에서 중요한 두 도시가 있습니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입니다. 그중 비교적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모헨조다로를 살펴볼까요? 모헨조다로는 앞에서 이야기한것과 같이 기원전 2500년 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기와 같죠.
크기는 어떨까요? 경복궁의 6.5배! 규모에서 보아도 작지 않은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커다란 공중목욕탕을 살펴보면, 적지 않은 규모의 상하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수도는 깨끗하게 정화된 물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라면 하수도는 다 쓰고 더러운 물이 빠져나가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물론 현대에서와 같이 쓰고나 오수를 정화하여 내보내고, 또다시 깨끗하게 소독한 물을 수도꼭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시로써는 놀라운 기술인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배웠던 로마 시대에서도 공중 목욕탕, 혹은 가정에 목욕탕 시설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시기는 기원후 70년으로, 인더스 문명보다는 훨씬 이후에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부유한 계층에서만 사용하다가 잊혀서 유럽에 하수도 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한 것은 중세를 훌쩍 넘어서 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늘 오수가 발목까지 차기도 했고 그 때문에 전염병도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아름다운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도 없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인더스 문명은 이미 그 시기에 상당히 발달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설을 갖출만한 지혜도 능력도, 또한 물질도 풍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도 문자
그들도 다른 문명과 같이 문자를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 해독해내지 못했습니다.이곳에서 발견된 도장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 직역, 이집트 지역을 오가며 활발하게 무역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복된 유물이 각각 발견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특이하게도 궁전이나 신전, 행정 정치에 관련된 건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들의 종교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 일정한 크기의 벽돌로 구운 집은 각기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평화롭고 비슷비슷하게 살아갔던 것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발달된 도시는 600년 이후에 사라지고 맙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몇가지 학자들도 몇 가지의 추측을 할 뿐입니다.
모헨조다로라는 이름도 죽음의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뭔가 무서운 일이 버러 진 모양입니다.
아리아인들의 이주
기원전15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인도 땅으로 이주해 옵니다. 말과 무기를 앞세워 들어온 아리아인들은 기원전 1000년 갠지스강 유역에 정착했습니다. 이때부터 철기를 사용하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원주민이 있는 곳에 들어온 아리아인들은 그 원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종교화 신분제도를 만들게 되는데요. 그 신분제도가 바로 카스트제도랍니다.
신분을 크게 4등급으로 나눕니다. 첫번째는 브라만, 사제 집단으로 종교 제사의 일을 감당합니다. 그들의 종교가 바로 브라만교였답니다. 어렵고 까다로운 의식의 제사를 담당하며 가장 높은 계급이었습니다. 두 번째 계급은 크샤트리아로 왕족과 무사, 증 정치를 담당하는 귀족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귀족집단도 브라만에게는 무릎을 꿇어야 했지요. 세번째는 베이샤, 평민으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목축을 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다음은 수드라 노예 계층입니다. 하지만 카스트 제도안에 조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그들을 불가촉천민이라고 부릅니다. 불가촉은 닿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뜻으로 그들은 너무나 천해서 실수로라도 귀족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의 몸에 닿았다면 잡혀가서 사형에 쳐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뚜렷한 계급을 나누어 놓으니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았을 것이고 지배계층인 브라만과 카샤트리아들은 이들을 지배하는 것이 손쉬웠겠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는 성밖에 고통의 찬 사람들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6년간의 고행을 통해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인간은 모두가 부처가 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 남자나 여자나 계급에 관계없이 도를 닦으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당시 귀족층이 었던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에게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크샤트리아는 귀족계층이만 여러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워갔음에도 불구하고 거만한 브라만은 넘어설 수 없는 존재였고, 활발한 무역과 상업으로 부자가 된 바이샤들도 그 지위에 어울리는 대접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고 시대의 상황에 맞게 크게 환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인도하면 힌두교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요, 그럼 이 힌두교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요?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던 인도는 4세기 굽타왕조 시대를 거치며 힌두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힌두교는 전통적인 브라만교와 불교와 민간 신앙을 다 섞어 놓은 모양의 종교입니다. 브라만교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제사의식은 빼고! 갠지스 강에 몸을 씻으면 다 깨끗해져~ 하고 종교 의식을 간단하게 바꿨습니다. 불교의 어려운 교리 다 빼! 그렇지만 부처도 하나의 신으로 인정해 줄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간인들이 믿는 신들 다 넣어!! 해서 탄생한 힌두교는 말 그대로 다신교입니다.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인도입니다.
이렇게 힌두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신분의 차별 때문에 그들이 택했던 불교를 통해서 카스트제도를 없앨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에는 그 시대와 꼭 같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크샤트리아와 베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신분제도를 없애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노예의 계급이 높아져서 자기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또 싫었겠지요.
인도의 문명과 인도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며 계급제도를 만들어 사람을 철저하게 차별하면서도 자신 높은 계급에 올라가고자 하는 우리들의 끝없는 욕심은 어디까지며 그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 신들이 필요했는지 궁금해집니다.
많은 신의 나라 인도였습니다.